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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로 핵을 만들어? - Cold Fusion, 북핵의 역사 북한의 군사력

바닷물로 핵을 만들어? - Cold Fusion, 북핵의 역사

오늘 기사에 바닷물을 이용하여 핵을 만들 수도 있다나 뭐라나 하는 기사가 있는가 보다.
소위 말하는 "상온핵융합"[低溫核融合(Cold Fusion)]이라고 하는 기술이다.



바닷물로 만드는 '核'

샌디애고 미 해군연구소, 한국자본·기술 공동개발 성공..
[Dr-J.W.Khim] 한국을 원자력 건설 강대국으로 만드는 작업 진행 중



▲ 1989년 처음으로 '콜드 퓨전'을 연구해 길을 연 마틴 프라이쉬맨, 스탠리 폰즈 박사- 오른쪽 붉은사진은 20년 전 당시 핵융합 광경


그런데 앞으로 다가올 100년 미국과 한국을 먹여 살릴 새로운 원자력 기술(GNE)은 물론 바닷물을 이용, 무한정으로 핵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상용화 단계에 돌입, 원! 자력발전소 수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한국에 밝은 미래를 안겨 주고 있다.

지금 샌디애고 미 해군본부 비밀연구소(SPAWAR)에는 세계적인 미 해군과 JWK 회사에서 파견된 핵과학자들이 지난 17년 동안 약 2,000만 달러를 투입, 성공시킨 프로젝트들이 2009년 3월 24일 국제 핵 관련 심포지움에서 발표돼 세계 과학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국제 핵 물리, 화학자들 사이에서는 低溫核融合(Cold Fusion)이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Cold Fusion을 성공 시킬 수 있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의 혁명이 될 것을 알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으나 실패, 거의 불가능으로 굳어져 왔었다.

그런데 해군연구소 과학자들과 JWK 과학자들이 지난 17년 동안 소문 없이 개발과 연구에 몰두, 지난 2006년에 결국은 바닷물을 이용해 핵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뉴클린 에너지로 명명된 ‘저온핵융합’ 으로 만들어낸 핵은 우선 원가가 싸고 원료가 바닷물이라 무한정이며 전기를 만들고 난 후에 핵 폐기물(찌꺼기)도 생기지 않아 공해 걱정이 없고 핵 폐기물을 처리하는데 사용되는 엄청난 경비도 절감된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uid=125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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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위 기사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어서 아래 소개한다.
모두의 일독을 권한다.

정 그럼 대답해 주마 멍청한 새끼야! - 이리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uid=125909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북한에서도 이미 오래전에 실험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있었는데....
학계에서 무시되었단다.


8 May 1989
The Rodong Sinmun reports that Kim Il Sung University has successfully conducted an experiment in “cold fusion.” [Note: This process was initially announced during a press conference at the University of Utah on 23 March 1989, but was later discounted in the scientific literature.]

1989년 5월8일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상온핵융합 실험에 성공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
그 사실은 원래 1989년 3월23일에 유타 대학 기자회견에서 공표되었던 내용인데 나중에 서양의 과학논문들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했다.
 


그리고 오늘 외교장관 유명환이 북한의 우라늄농측이 1996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북한 핵개발 역사를 정리해보고, 북한의 실제적 핵기술능력이 어느 정도일 것인지
가늠해 보기로 한다.

물론, 아래 소개하는 자료들은 모두 미국계 연구기관들 자료들인데
따라서 당연히 북측의 실제적 핵기술 수준 보다도 훨씬 더 낮게 평가되어 기술된 것들임을 알고
읽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 미국인들에게 북한은 "적국"이므로
가능한 저평가 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몇일전에 아프간에 파병된 어느 정보부서 관련 미국 장성이 미국 정보부서들이 올려주는 정보들은
모두 쓰레기 같아서 실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 한 바 있다.
왜냐면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cia 등 미국정보기관들은 수집된 정보들을 가능한 저평가해서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아전인수적 해석만 해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용지물의 쓰레기 정보들만 양산되는 것이다.

 사실 현재 북미간의 협상이 지루한 줄다리가 되는 원인 중에 하나도
북한은 자신의 정보를 최대한 숨기고, 그저 필요한 정보만을 찔끔찔끔 흘릴 뿐이고
미국은 드러난 북한정보들 마저도 아전인수적으로 북한저평가적 정보해석을 함으로써
미국정부는 아직도 북한에 고작해서 몇개의 원시적 핵만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 아직도 북핵을 제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과 핵능력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면
북핵제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아프간서 美 정보기관 분석, 쓸모없는 경우 많아!”


이남진 | 입력 2010.01.05 15:57


【카불=AP/뉴시스】이남진 기자 =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마이클 플린 소장은 4일 보고서를 통해 "지난 8년 아프간 전쟁 동안 미국 정보기관의 실적이 매우 저조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플린 소장의 이번 보고서는 아프간 동부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7명이 사망한 지 일주일이 안 된 시점에 나왔다.

 

플린 소장은 보고서에서 "미국 정보기관의 분석이 아프간 국민들과 경제, 정치 실력자 등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작성돼 실전에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지휘관들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얻기 원하지만, 정보기관의 정보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한편 아프간 주둔 미군의 정보 참모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플린 소장의 보고서는 워싱턴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Center for a New American Security)에 의해 공개됐다.



자, 이제 위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아래 내용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측 핵관련 연구소들에 의한 북핵개발 역사 정보

1952 12월: 원자력 연구소 설립

1956 2월: 북-쏘 원자력 합동연구소 설립 및 핵과학자 러시아 파견 및 양성

1959: 북-쏘 영변 연구용 핵원자로 건설 합의

(참고: 1959년: 이승만 정부 시절 한국원자력 연구소 설립)
1960년대 초: 영변 핵연구소 설립, 소련제 IRT-2000 핵연구 원자로 설치

1962년 쿠바 위기: 북한 핵개발을 촉진하게 된 계기로 추측됨.

북한의 자체적 핵개발 과정

북한은 소련, 중국 등 외부의 도움이 거의 없이 자체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해왔다.

6.25 때의 소련의 지원 부족과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김일성은 소련을 신뢰하지 않았고,
중국의 첫번째 핵실험 이후 김일성은 중국에 핵기술 공유 요청했으나,
그것을 단호히 거절한 중국과도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1960년대 초: 핵과학 기술교육과 핵연구소 강화 및 확대

1970년대 초: 소련제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자체 힘으로 확장 및 소련으로부터 플루토늄 재처리기술 획득

1980년대 초: 핵기술의 획기적 진전이 있었음. 핵연료봉 제조공장 설립 및 핵폭탄 뇌관인 고폭화약실험 시작

1980년대 중반: 영변에 50메가와트 핵원자로 건설 시작 및 우라늄 처리시설 확대 및 우라늄 농축 기술과 설비 획득

1980년대 초~중반: 자체적으로 개발한 핵원자로 개발계획의 확대

(출처: http://www.nti.org/e_research/profiles/NK/Nuclear/index.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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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개발 역사

1974: 연구용 소련제 실험로 자체기술력으로 현대화 및 우라늄 80%로 농축 가능하도록 개조 및 제2 실험용 원자로 건설 시작

1980년대: 핵무기 개발 시스템 완성 노력과 고폭화약실험 실시


(출처: http://www.fas.org/nuke/guide/dprk/nuke/index.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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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 박사 방북보고서

핵실험을 한 나라들 중 북한만이 유일하게 최초핵실험 사실을 전세계에 사전에 공표하였다. 그래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북한측에 물어보니, 북한군 장성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핵실험 사실을 미리 공표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또는 그와반대로 우리는 핵실험이 안전하게 시행될 것임이 확실하다고 사전에 미리 공표할 수도 있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느 쪽이 더 유익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북한의 최초핵실험 결과치는 0.2~1k톤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핵보유국으로 공인된 7개 국가들의 최초핵실험 결과치들은 모두 10~60k톤이었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은 21k톤이었다.


첨단기술이 필요한 정밀한 핵폭탄의 실험만이 낮은 결과치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데,
왜냐면 최초핵실험에서 무수한 기술적 변수값들을 정확하게 조정한다고 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정밀한 핵폭탄의 실험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최초핵실험 치고는 매우 커다란 기술적 발전을 의미한다.


http://www.fas.org/nuke/guide/dprk/nuke/hecker11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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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회 조사보고서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꺼리는 익명의 행정부 관료에 의하면, 북한의 대포동 2호의 새로운 버전인 대포동 X(=은하2호 등)의 사정거리는 15040 km로서, 이론적으로는 미국 전역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감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구소련의 잠수함용 탄도미사일인 SS-N-6을 개량한 것이며, 그 기술은 아마 1992~1998년 사이에 입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몇년전부터 대포동 X 개발이 성공하여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고, 그 사거리와 정확도를 높이기 위하여 SS-N-6 기술이 응용되었음을 정보당국이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바로 작년에서야 미국 정보당국은 그것을 겨우 인정했다.
 
북한은 아마 그 기술을 러시아의 해군이나 마카에프 미사일 연구소에서 획득했을 것이다.


(출처: http://www.nautilus.org/DPRKbriefingbook/missiles/CRS-RS21473_DPRKMissileThreatUS.pd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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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탈북자 김태호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1989년에 농축율이 최소 97%에 이르는 
핵무기급 우라늄농축에 성공하였다.
 
북한의 저명한 핵기술자인 박관오 교수가 이란을 방문하였다.




위 사실들을 살펴보면....북한은 이미 80년대에는 핵기술을 마스터했을 것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미사일 기술 조차도 적어도 90년대~2000년대 들어서는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은하2호 발사 성공으로 김정일이 이제 북미핵대결은 완전히 끝났다고 보고
북한내 국내경제 향상에 올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북측은 올해 북미간 핵대결의 승패를 확실히 결정짓고자 할 것으로 보여진다.
즉, 올해내로 이미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들을 매듭짓고자 시도할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 미국측이 망설이고자 하더라도, 북측은 그런 아량을 배풀어 줄 것 같지 않다.
왜냐면 북측의 경제성장 달성 목표도 급하기 때문이다.

어쨋든, 위 내용들 중에 나의 눈을 특히 끄는 부분은 맨 아래 있는 부분이다.
즉,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돕기 시작한 것이 파키스탄 좌파당인 인민당 당수
부토 여사가 집권한 88년 이후, 아마 90년대 초부터인 것으로 아는데
그 때 이미 이란과도 그런 접촉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이란도 이미 핵이 있음이 확실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란이 미국에 대해 그렇게 세게 나가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여전히 미국본토 도달가능한 대륙간탄도 미사일 기술이 없어서
핵보유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이란은 이미 인공위성 발사에도 성공한 바 있다는 사실.

위 자료들의 영문기사 출처는 아래 소개한다.


Early Program

In the early 1950s, North Korea began establishing the institutional base to train personnel for its nuclear development program. The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was established along with the Academy of Sciences in December 1952, but the nuclear program did not begin to take-off until North Korea established cooperative agreements with the Soviet Union. Pyongyang signed the founding charter of the Soviet Union's Joint Institute for Nuclear Research in February 1956, and began to send scientists and technicians to the USSR for training shortly thereafter. In 1959, North Korea and the Soviet Union signed an agreement on the peaceful use of nuclear energy that included a provision for Soviet help to establish a nuclear research complex in Yongbyon-kun, North Pyongan Province.

In the early 1960s, the Soviet Union provided extensive technical assistance while North Korea constructed the Yongbyon Nuclear Research Center, which included the installation of a Soviet IRT-2000 Nuclear Research Reactor and other facilities. The small research reactor has been used to produce radioisotopes and to train personnel. The cabinet and the Academy of Sciences were given operational and administrative oversight of the nuclear facilities, but ultimate control of the program and decisions over weapons development belonged to then-North Korean leader Kim Il Sung. The program appeared to begin as a peaceful one, but the 1962 Cuban Missile Crisis may have prompted North Korea to initiate a dedicated nuclear weapons program.

Indigenous Development

Although the beginnings of the development of North Korea's nuclear weapons program were bolstered by relevant assistance from Moscow, and to some extent Beijing, North Korea's program developed largely without significant foreign assistance. This was in part due to suspicions that the North Korean leadership had about the long-term reliability of the Soviet Union and China. While Kim Il Sung appreciated Soviet and Chinese support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he had expected more help, particularly from the Soviets, and he was dissatisfied that the war ended in a stalemate. In 1961, Pyongyang signed "treaties of friendship, cooperation, and mutual assistance" with both Moscow and Beijing, but Kim ultimately questioned the credibility of these alliances. Kim was particularly doubtful of Moscow's alliance commitment after Khrushchev backed down during the Cuban Missile Crisis. Soon after the missile crisis was over, the Korean Workers' Party Central Committee adopted policies to strengthen the military and to implement import-substitution programs to reduce dependency on arms imports. There are also reports that Kim Il Sung asked Beijing to share its nuclear weapons technology following China's first nuclear test in October 1964, but Chinese leader Mao Zedong refused. Shortly thereafter, North Korean relations with China began to deteriorate.

In the late 1960s, North Korea expanded its educational and research institutions to support a nuclear program for both civilian and military applications. By the early 1970s, North Korean engineers were using indigenous technology to expand the IRT-2000 research reactor and Pyongyang began to acquire plutonium reprocessing technology from the Soviet Union. In July 1977, North Korea signed a trilateral safeguards agreement with the IAEA and the USSR that brought the IRT-2000 research reactor and a critical assembly in Yongbyon-kun under IAEA safeguards. The Soviets were included in the agreement since they supplied the reactor fuel.

The early 1980s was a period of significant indigenous expansion, which included uranium milling facilities, a fuel rod fabrication complex, and a 5MW(e) nuclear reactor, as well as research and development institutions. The early 1980s also marked the beginning of high explosives test that are required for the triggering mechanism in a nuclear bomb. By the mid-1980s, Pyongyang began construction on a 50MW(e) nuclear power reactor in Yongbyon-kun, while expanding its uranium processing facilities. Some of technology and equipment acquired during this period had dual-use applications for a uranium enrichment program that was not revealed until the late 1990s.

North Korea's energy concerns make nuclear energy a legitimate rationale for nuclear power, and Pyongyang explored the acquisition of light water reactor (LWR) technology in the early to mid-1980s. This period coincided with the expansion of North Korea's indigenously designed reactor program, which was based on gas-graphite moderated reactors similar in design to the Calder Hall reactors first built in the United Kingdom in the 1950s. In the early 1980s, Pyongyang was also exploring the acquisition of light water power reactors, and agreed to sign the NPT in December 1985 in exchange for Soviet assistance in the construction of four LWRs.

http://www.nti.org/e_research/profiles/NK/Nuclear/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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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North Korea maintains uranium mines with an estimated four million tons of exploitable high-quality uranium ore. Information on the state and quality of their mines is lacking, but it is estimated that the ore contains approximately 0.8% extractable uranium. In the mid-1960s, it established a large-scale atomic energy research complex in Yongbyon and trained specialists from students who had studied in the Soviet Union. Under the cooperation agreement concluded between the USSR and the DPRK, a nuclear research center was constructed near the small town of Yongbyon. In 1965 a Soviet IRT-2M research reactor was assembled for this center. From 1965 through 1973 fuel (fuel elements) enriched to 10 percent was supplied to the DPRK for this reactor.

In the 1970s it focused study on the nuclear fuel cycle including refining, conversion and fabrication. In 1974 Korean specialists independently modernized Soviet IRT-2M research reactor in the same way that other reactors operating in the USSR and other countries had been modernized, bringing its capacity up to 8 megawatts and switching to fuel enriched to 80 percent. Subsequently, the degree of fuel enrichment was reduced. In the same period the DPRK began to build a 5 MWe research reactor, what is called the "second reactor." In 1977 the DPRK concluded an agreement with the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allowing the latter to inspect a research reactor which was built with the assistance of the USSR.

The North Korean nuclear weapons program dates back to the 1980s. In the 1980s, focusing on practical uses of nuclear energy and the completion of a nuclear weapon development system, North Korea began to operate facilities for uranium fabrication and conversion. It began construction of a 200 MWe nuclear reactor and nuclear reprocessing facilities in Taechon and Yongbyon, respectively, and conducted high-explosive detonation tests. In 1985 US officials announced for the first time that they had intelligence data proving that a secret nuclear reactor was being built 90 km north of Pyongyang near the small town of Yongbyon. The installation at Yongbyon had been known for eight years from official IAEA reports. In 1985, under international pressure, Pyongyang acceded to the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 However, the DPRK refused to sign a safeguards agreement with the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an obligation it had as a party to the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http://www.fas.org/nuke/guide/dprk/nuke/index.html

[1/2]   해커 박사 방북보고서 

We told our hosts that they are the first country to announce its first nuclear test. Moreover, the apparent DPRK explosion yield is much lower than those of the first tests conducted by other countries.
Why did they announce their test?
 
The military official answered, “We could either not announce, or announce and make certain that the test is carried out safe and secure. Which is more beneficial and reasonable?” To summarize the DPRK nuclear testing discussions, their officials declared it a successful test of a plutonium nuclear device.

Based on independent seismic measurements around the world, the test had an explosion yield between 0.2 and 1 kiloton.

The explosion yields of the first nuclear test conducted by the seven declared nuclear weapons states range from approximately 10 to 60 kilotons. The Nagasaki bomb yielded approximately 21 kilotons.

A test of a sophisticated device could readily explain the low yield since it is very difficult to get all technical parameters correct the first time. Opting for testing a sophisticated device would represent a big step for a first test.
 
[2/2]   미국의회 조사보고서 
 
A New Version of the Taepo Dong 2?
Prior to September 9, 2003—the 55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U.S. and international press speculated that North Korea might display a new, longer-range version of the Taepo Dong 2 missile as well as an unnamed intermediate range missile during military parades held in Pyongyang. Despite this widespread speculation, no new military hardware, including ballistic missiles, was observed during the 90- minute parade.
 
 Unidentified Bush Administration officials, claiming to have access to intelligence reports, referred to the allegedly longer-range version of the Taepo Dong 2 as the “Taepo Dong X” and stated that intelligence analysts estimated that it would have greater range and accuracy than previous versions of the Taepo Dong 2.
 
 Another Administration official reportedly stated that the Taepo Dong X would have sufficient range to strike Hawaii, Alaska, California, or “most of the West Coast.”
 
 In another press report, an Administration official who “asked not to be identified” estimated the Taepo Dong X’s range at 9,400 miles (15,040 kms) which, in theory, would enable the Taepo Dong X to strike virtually anywhere in the United States.
 
According to unidentified U.S. intelligence officials, the Taepo Dong X is believed to be based on the former Soviet Navy SS-N-6 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 that North Korea may have possibly obtained from Russia between 1992 and 1998.
 
According to this official, the Intelligence Community has “had hints of this for several years” but only within the last year were they able to confirm the Taepo Dong X’s existence and its use of SS-N-6 technology to improve its range and accuracy.
 
Officials stated that there was no indication that the Russian government had sanctioned missile sales to the North Korean government in “at least five years.”
 
An unnamed congressional source reportedly noted that the Russian Pacific Fleet, which deployed the SS-N-6, was “desperately disorganized and underfunded” during the period between 1992 and 1998, suggesting that North Korea might have obtained SS-N-6 technology from the Russian Navy or the missile’s designer, the Makeyev Design Bureau, without the knowledge or approval of the Russian government.

It is possible that North Korea developed another version of the Taepo Dong 2 with relatively little advanced knowledge by U.S. intelligence agencies. The secretive nature of North Korea’s ballistic missile program is not without precedence - their August 1998 Taepo Dong 1 launch came with little warning.

http://www.nautilus.org/DPRKbriefingbook/missiles/CRS-RS21473_DPRKMissileThreatU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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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According to defector Kim Tae Ho, North Korea produces weapon-grade enriched uranium with a U235 concentration of at least 97 percent.
 
1989
Professor Pak Kwan O (박관오), a renowned North Korean nuclear engineer, visits Iran.
8 May 1989
The Rodong Sinmun reports that Kim Il Sung University has successfully conducted an experiment in “cold fusion.” [Note: This process was initially announced during a press conference at the University of Utah on 23 March 1989, but was later discounted in the scientific literature.]
 




덧글

  • 아름다운사람 2010/01/07 09:08 #

    음...예전에..8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상온 핵융합이 대세인 것처럼 언플하던 과학자들께서 세계를 오염시키셨습니다.
    우리나라 S대에서도 상온 핵융합을 실험실 수준에서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물 속의 수소를 이용해서 헬륨을 만드는 거죠.
    노벨상을 타신 화학계의 거두 폴링 박사께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실험 중 발생한 열은 핵융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기나 기타 사용에 의하여 발생한 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완전하게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아마도 거의 내용이 맞을 겁니다.)
    전세계가 그 한 마디에 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물론 북한도 그 때 같이 가라앉았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 때 제3의 힘이라는 만유척력의 법칙에 대해서 우주왕복선 과학자들이 주장했는데, 그 것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으며, 그것은 지금 약간의 희망은 있어보인다는 게 위와 다른 점입니다.
  • 바람의자유 2010/01/07 12:30 #

    이분은 포스팅에 일일히 관련글 링크도 걸으시고, 나름 성실하게 글 쓰시긴 한데...
    근거로 대는 소스는 좀 생각하시고 대시는게 ...;
  • 정론직필 2010/01/07 14:52 #

    위에....지들 멋대로 흥분해서 내 글을 비난하는 댓글들을 단 멍청이들....
    내 글을 다시 한번 잘 보기를 바란다.

    나는 북한에서 그런 발표를 노동신문에서 한 적이 있고,
    세계학계에서 그런 발표를 어떻게 취급했는지에 대해서
    그냥 단순 "팩트"만 적시한 것이지.....

    그로써 북한이 정말로 그것을 상용기술화했는지
    또는 무기기술화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나는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니네들이 지레짐작으로 입에 게거품을 물고
    마치 내가 북한이 실제로 그것을 성공해서 상용화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한 것으로
    진실왜곡적 광란을 벌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너무나 이상하지 않냐???
    ㅉㅉㅉ
  • 정론직필 2010/01/07 16:50 #

    트랙백과 댓글들을 읽어 보았는데....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을 지들 멋대로 지어내서
    진실왜곡을 하는 멍청이들의 글들만 있길래
    그런 것들은 모조리 삭제 조치해 버렸다.

    우선 내 글을 제대로 읽고,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댓글이나
    트랙백 글을 쓰도록.....!!!!
  • 청풍 2010/01/08 17:48 #

    님 핵을 가진 북한과 핵이 없는 남한의 대결에 관한 마지막 뻘개소린 어디로 사라졌나효?
  • 이레아 2010/01/07 20:38 #

    윗분들//
    정론직필님은 원래 자기 주장이 없으시고 오로지 남이 제시한 팩트만 컨트롤+V하는 분이십니다. 까시려면 정론직필님이 복사해온 원글을 까세요. 죄없고 주장없는 정론직필님 까지 마시구요.
  • 닉네임 2010/01/08 02:24 #

    하하하하하하
  • 닉네임 2010/01/08 02:30 #

    본문의 맥락을 읽어보면 주인장은 이런 주장을 하는거 같습니다.

    북한의 핵기술이 이정도나 돼? 게다가 이란이나 다른 테러국가에 전파하고 있네~ 신빙성이 없다고 하지만 그말도 믿지는 못하겠고, 믿을 수 있는게 없다. 아이 겁나라.

    이러시는거 같습니다.
    개 뻥이라고 해도 언제든 남한에 화학미사일을 날릴수 있는 북한의 으름장이니 뭔가 무섭고 짜증이 나는 것은 사실이긴합니다.
  • 꼬마니체 2010/01/09 22:47 #

    상온핵융합[低溫核融合(Cold Fusion)]????...低<==이거 "낮을 저"자 아님???그리고 언제 cold가 상온이 됏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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