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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역사- 친일파가 창당 남북한 문제

민주당의 역사- 친일파가 창당

찌라시 기사에....선관위가 각 정당들의 공약과 정강정책을 요약해서
투표권자인 국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는 뜬금없는 기사가 떠서
선관위에 방문해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네....예상했던대로 였습니다.
ㅎㅎㅎ

선관위가 요즘 누구 똘마니짓을 하고 있는지는....여러분들 모두 잘 아시죠???
ㅉㅉㅉ
지난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는 매우 잘나가던 선관위가 어쩌다 그 신세가 되었는지???

그래서.....내친김에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각 정당들의 실제적 정강정책들이 무엇인지....
그래서 검색을 하는 과정에.....아래와 같은 흥미있는 자료들을 발견하여
여러분들에게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네.....김대중, 노무현의 민주당.....
한나라당과 그 지지세력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민주당이 정말로....
좌파 빨갱이당일까요???
ㅎㅎㅎ 그건 정말이지.....넌센스입니다.

그동안 민주당이나 민주당 의원들 중에도.....
매우 해괴한 짓을 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지요.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네.....민주당은 본래.....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과도 연이 닿지만
그러나 많은 친일매국노들도 가담한 그런 정당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민주당은......그 뿌리 자체가 "보수, 우익"이었지요.

그렇다면.,..오늘날 자칭 "보수, 우익"을 주장하는 한나라당 세력, 자유선진당 세력 및 뉴라이트 세력
무엇이냐구요??? 네....그 정체를 까발리기 전에....우선 해방직후 진짜 "좌익"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아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물론, 나는 사학자가 아니므로....아래 내용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자료로는 충분할 것이라고 봅니다)


정부수립전후 중요정당의 정강정책연구


1. 韓國民主黨

  
  韓國民主黨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 建準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1945년 9월 6일 人民共和國의 수립이 선포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重慶臨時政府 絶對支持의 기치를 내 걸고 조직된 保守政黨이다.
  1945년 9월 4일 元世勳·金炳魯·趙炳玉·李 仁·白南薰 등이 주동이 되어 代表 82명으로 黨의 發起人總會를 개최, 黨名을 韓國民主黨으로 결정했다.


共産黨을 비롯한 左翼勢力들은 모스크바 3相會議 決定을 지지하였으며, 民主主義民族戰線라이는 政治的 統一戰線體를 형성하게 되었다. 韓國民主黨을 비롯한 右翼側에서는 모스크바 三相會議 決定을 반대하면서 광범한 反託陣營을 형성함으로써 贊託과 反託으로 左右對立이 構造化되었다.

4. 朝鮮共産黨

  
  8·15해방이 되자 제일 먼저 政治活動을 展開한 것은 共産主義者들이었다. 共産主義 세력은 강력한 反日抵抗세력으로서 解放 전까지의 활동을 지속해 왔기 때문에 재빨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쉽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日帝下에서 共産主義 운동에 參與한 바 있는 李英·李承燁·趙東祐·崔益翰·李延允 등은 해방의 바로 그날 밤 서울 鐘路 長安빌딩에 모여 16일 이른 아침에 朝鮮共産黨結成을 마쳤.

이날 發表된 '朝共'의 中央幹部들은 朴憲永 自派一色으로 構成되었으며, 長安黨의 李英, 鄭栢, 崔益翰, 李延允 등은 除外되어, 派爭의 불씨를 안은 채 出發했다고 볼 수 있다.
  
  總秘書 : 朴憲永
  政治局 : 朴憲永·金日成·李舟河·式亨·姜進·崔昌益·李承燁·權五稷
  組織局 : 朴憲永·李鉉相·金三龍·金炳善
  書記局 : 李舟河·許成澤·金台俊·李龜燻·李順今·姜文錫

基本課業 : 民族的 完全獨立과 土地問題의 革命的 解決
(기본과업: 민족적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

   其他重要課業(기타중요과업) : ① 言論, 出版, 集合, 結社, 衛題行進, 罷業의 自由,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가두행진, 파업의 자유) ② 8時間勞動制의 實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③ 一斑勞動大衆生活의 急進的 改善 (일반 노동대중생활의 급진적 개선) ④ 日本帝國主義者 所有의 모든 土地, 寺院, 山林, 鑛山, 工場, 港灣, 運輸機關, 電信, 銀行等 一切財産을 無償沒收하여 國有化 (일본제국주의자 소유의 모든 토지 등을 무상몰수하여 국유화) ⑤ 國家負擔에 의한 義務敎育實施 (국가부담에 의한 (무상)의무교육실시) ⑥ 女子의 經濟的 政治的 社會的 地位向上 (여성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 향상) ⑦ 軍一累進稅金制失恃 ⑧ 國民義兵制實施 ⑨ 18歲 以上의 男女平等의 選擧 被選擧權 부여

http://blog.naver.com/smallnews/57299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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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시대부터 강력한 항일독립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선언한 날 밤 즉시 정치세력화 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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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아래와 글도 있군요.
한민당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군요.)

ㄱ) 이승만의 귀국 배경
이승만의 귀국후 미군정은 한민당의 창당을 돕고, 한민당 지도자들을 미군정 관료로 많이 고용한 뒤에도 몹시 불안했다. 미군정의 동맹자인 보수적인 국내 우익들이 과거에 친일했다는 경력 때문에,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여 활기있는 정치조직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http://ref.daum.net/item/2190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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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을 통해서 쉽게 눈치챌 수 있는 것은....
해방직후 혼란한 한국사회 상황을....미군이 손바닥 보듯 장악하고
막후에서 모든 정치세력들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많은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거기에 당한 셈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우익의 테러

흔히 역사책에서는 해방 후의 정세를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표현한다. 심지어 좌파들도 좌우대립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답답한 맘이 든다. 해방 후의 정세는 압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민중진영의 자주독립의지와 이를 좌절시키려는 미군정의 폭압과 우익의 테러로 규정할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소위 반탁, 신탁 논의도 그런 면에서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루즈벨트는 조선반도에 대해 50년의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반면 소련은 조선민족이 자주독립역량이 충분함을 들어 신탁통치를 일관되게 반대했다. 이러한 사정이 작용하여 신탁통치 기간은 30년, 10년 나중에는 5년까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이 아닌 모든 주권을 조선민중에게 주고 연합국은 후견인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피력하여, 결과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5년간의 후견기간이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켜 3.8선 이남에서의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우익을 동원하는 방식을 취했다.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등에게 마치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한 것처럼 거짓정보를 흘리고, 이들에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투쟁을 사주하였다.

처음 언론 등을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동안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당과 민중들은 상당한 혼란에 빠졌다. 5년간의 신탁통치는 조선민족의 자치역량을 무시하는 행위로 모두가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당의 계통을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문 원본이 도착했다. 거기에는 분명 연합군은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사태는 명료했다. 우리는 우익이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것이 명백히 미군정의 지배를 연장하려는 음모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음날 우익들은 서울에서 5만 명을 동원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소위 반탁집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동원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민중진영은 같은 시간에 50만 명이 모여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집회를 조직했다.

http://hb.jinbo.net/view.php?cat=column&no=1141



자, 이제 그럼 민주당의 뿌리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민주당 이종걸 의원님 집안이 진짜 우익 민족우익임

상해 임정세력들은 미 군정으로부터 한국 유일정부 인정받지도 못한체..

백범 김구, 해공 신익희등 임시정부사람들 초라하게 입국했고..

해방후의 극심한 대립과 남북 분단은 광복군이 한국에 진입했더라면 사라졌을 문제였는데..

 

광복된 한국에서..

백범 김구선생님은 한독당을 이끌었고.

김구와 함께 상해임정을 이끌면서 독립투쟁하였던.. 해공 신익희 선생은 대한국민당을 창당했고.

한국 내부에서는 지식인과 (친일)지주들이 모여서 한민당을 창당했다..

 

김구의 한독당, 신익희의 대한국민당, 한민당등이 주축이 되어서 제헌헌법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주축이였던 세력이기도 했다.

 

백범 김구선생님이 암살당하자 한독당은 붕괴되었고.

1950년 대한국민당과 한민당이 합당해서 민주국민당을 결성했고, 해공 신익희선생이 당의장에 취임했고. .

이시영 선생이 1952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오늘날 이회영 선생의 친손자가 민주당 국회의원 이종걸 의원님.

 

1955년 민주국민당을, 신익희 선생등이 중심이 되어서 민주당으로 확대개편했다..


http://blog.daum.net/hjmok78/10952510



보다 더 상세한 설명과 사진자료들이 있는 아고라 글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맨 밑에....아주 냉정하게 쓰여진 좋은 글의 링크주소도 소개하겠습니다)


  • 민주당의 역사- 친일파가 창당 [24]
  • 공돌이 ding**** 공돌이님프로필이미지 번호 294540 | 08.10.08 10:56 조회 2567 주소복사
  •  

    민주당이라는  당명은 광복후  친일파가 창당하면서 사용한 것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민주당이 친일파라는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민주당은 전통야당이라는 말에서   계승의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952년 이승만과 김성수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자 친일파 김성수가

    부통령을 사퇴하고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을 창당.

     

    .그후 신익희.친일경찰의 수괴 조병옥이 이승만 대통령이 3선개헌을

    추진하고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자리잡자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합류하였다

     

    .56년에 신익희가 60년에 친일경찰의 수괴조병옥이 못살겟다 갈아보자를

    선거 구호로 출마하였으나 선거 유세도중 둘다 돌연사 한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마산에서 시민운동이 일어나자 경찰이 김주열을

    사살하고 바다에 버린것이 발각되어 서울에 까지 알려지자

    4.18일 친일파 김성수가 세운고려대를 선두로 4.19일 서울시내로

    확산되어 서울시내가 학생과 시위대에 점령되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4.19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의원내각제로 고치고 친일파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친일파 장면을 총리로 선출하고 출범하였으나 이둘이

    권력 투쟁을 벌이자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켜

    장면을 몰아내고 윤보선과 군정을 주도한다

     

    그이후 민정이 이양될것 같자 친일파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정당을

    창당해 63년 .67년 두차레 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두차레다 15만표차이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낙선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추진하자 이를 저지하기위해 민정당과

    민중당이 통합하여 신민당[신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71년 김대중을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나 1백만표차이로 낙선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세력인 김대중을

    감금하고 정치탄압을 시도하자 김영삼대통령을 중심으로한 신민당과

    김대중 대통령으로한 재야파로 분열되어 반유신 투쟁을 벌인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한테 암살당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가택구금에서

    풀려나자 양김은 직선제 개헌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대선활동을 벌이나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 의해 무산된다   

     

    &민주당의 역사

     

    *자유당[52년]-민주당[52년-61년]-63년윤보선민정당[민정당-김영삼.민중당김대중]-신민주당[신민당;67년-80년]-신한민주당[신민당;85년-88년]-통일민주당[민주당87년91년].평화민주당[평민당;87년-92년]-민주당[92년-97년]-새정치 국민회[국민회97년-2000년]-새천년 민주당[민주당;2000년2004년]-열린우리당[우리당2004년-2008년].민주당[2004년-2009년]

     

    &보수당의 역사

     

    한국민주당[1945년]-이승만 대통령자유당[52년-60년]-국가 재건위원회[박정희 대통령61년-63년]-박정희 대통령공화당[민주공화당61년부터 -80년]-국가보위[80년]-전두환 대통령민정당[80년-91년]-노태우 대통령민자당[91년-95년]-김영삼 대통령신한국당[95년-97년]-이회창후보한나라당[97년 -2007년] 

     

    추가>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와 손잡은 것은 생략하였습니다

         보수당의 역사는 너무나 명백한 친일파 계통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입니다       

          

     조병욱

     

    조병옥의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유석(維石)이며,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출생하였다.

     

    먼저 그의 학력인 컬럼비아대학 경제학박사라는 것은 증거없는 허위사실이다. 그는 실제로 컬럼비아 학적부에 기재되지 않았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무지한 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학력을 멋대로 속였다.

     

     조병옥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충실하게 독립 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야당의 거목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병옥이 일제 시대에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증거로 먼저, 조병옥은 1941년 8월25일 부민관 중강당에서 열린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해서 윤치호, 장덕수, 최린, 이광수, 주요한 등 주요 친일인사들과 함께 비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 제국의 신민으로서 이 마당에 모였습니다. …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해방 후 미군정 경무부장으로써 일제부역 경찰을 대거 임용했을 뿐만아니라  1947년 7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를 통과시키자 친일파 일색인 경찰에 이 법이 적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규제 조항의 수정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제주 4.3항쟁에서 보여주었던 태도이다. 4.3항쟁이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에서 비극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1948년 총인구 27만 명의 섬에서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인데, 제주도민에게 그리고 민족적 양심으로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여겨지고 있다. 조병옥은 4·3 당시 최고의 물리력을 휘둘렀던 미군정 경무부장이었다. 당시 경찰은 가장 조직적으로 훈련되고 최고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총관한 사람이 바로 경무부장인 조병옥이었다.

     

     4·3의 강경 진압 역시 조병옥의 독려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5백여 명의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고, 경무부장인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려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등 극우세력은 폭행, 고문, 살해, 방화를 일삼았다. 육지에서 유입된 토벌대는 무제한적인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 방화, 무차별 학살을 자행 북촌 주민 학살 사건 등 집단적인 주민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그는 4.3항쟁의 근본 원인은 "소련의 야심인 조선의 소령 연방화에 있다"고 몰아갔다. 그는 오히려 유화론자였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을 '공산주의 청년'으로 몰아 쫓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조병옥의 뚜렷한 친일행각과 4.3항쟁의 비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에게는 그가 야당의 거목이며 민주주의를 이끈 지도자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조병옥이 반공활동을 앞장서서 했던 이유는 친일파를 이용한 미군정의 전략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친일전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해방 직후 정국을 주도했던 통일운동 세력이 미군정에 의해 거세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 동안 밀월 관계를 가졌던 조병옥(한민당)과 이승만은 권력의 분배과정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병옥은 이승만에게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야당의 길을 걷게 된 것이며 그로 인해 그는 야당의 거목으로,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친일파의 앞잡이였으며 해방 후 그것을 덮기 위해 박쥐처럼 미군정에 붙어 우리민족을 학살한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김성수

     

    중일전쟁 이후 부일협력의 길로

    김성수는 언론.교육.산업 보국의 정신에서 일탈하여 중일전쟁후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다. 1939년 9월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출연하여 일제의 전시동원을 호소하였으며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석하고,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7월에는 이른바 황국신민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 내에 조직되었던 협화회의 재경성유지간담회에 참석, 발언 한 바 있다. 1940년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참여하고, 1943년 이 단체의 총무위원으로 활동 하였으며 1941 년 8월 일제의 전쟁동원에 협력하는 흥아보국단의 결성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10월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8월부터 학병제,징병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하였다. 이해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라는 논설을 쓴데 이어 11월 6일자에 [대의에 죽을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논설을 썼다. 이 밖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글과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활발한 정치활동

    해방후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 부회장. 부통령 둥을 역임했다. 김성수는 이후 야당인 민주국민당 고문으로 활동하다 1955년에 사망했다.

    문약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의 정신을 찬양하라 "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 )

     

    1 아등(我等)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報)하자, 이 조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생존목표를 달(達)하는 대관절(大 關節)이다. 특히 조선청년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 목표 를 확정함으로 써 제일 주장을 삼는 것이다. 이 목표가 확정됨으로 부터 만상(萬象)이 정시(正視}되고 군의(群疑)가 해소되는 것이다.


    2. 아등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서 단결을 굳게 하자 이 일절이야말로 종래 우리 조선인의 정문(頂門)의 일침이다. 우리 종래의 모든 결점이 오로지 상호 신애협력을 못 하는 것과 그 결과로 10인(人) 10색(色). 100인(八) 100기(幾)로 단결이 되지 못하는 바 있던 것이다. 폐일언하고 인간은 일종의 집단동물이다.

    집단의 위력을 발휘치 못한다면 그 실력이 저 봉의(峰蟻)에게도 멀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집단이 즉 단결이요, 단결이 되려면 그 분자 분자가 상호 신애협력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애협력을 지분 절해( 肢分節解)하여 설명하려면 기천권 수신서(修身書)로써도 부족 할는지 모르나 간명적절(簡 明適切)히 말하라면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 일상 경송(敬誦)하는 교육칙어(勅語)의 일절{一 節}을 봉서(奉書) 해보자.

    '부모에게 효(孝)하고 형제에게 우(友}하고 부부상화{夫婦相和)하고 붕우상신(朋友相信)하라' 이 일절 중에 소위 신애협력의 전부가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충군'의 2자는 표시되지 아니하였으나 기실 효도 충군의 일단이요, 우도 충군의 일단이요, 화신(和信)도 또한 그러하다.

    신민(臣民) 이 모두 상호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였다가 일단 완급(緩急)이 있으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것이 충군{忠君)의 지상방법(至上 方 法)이며 우리 생활의 의미가 전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子)가 되어서는 자의 직 (職)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형재의 책(責)을 다하고 부부.붕우가 각기 그 소처(所處)의 직책 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애협력 의 요체이다.


     장 면

     

    장면의 첫 번째 친일행적은 1938년 2월 9일 경성연합청년단장 마에다(前田昇), YMCA 대표 윤치호(尹致昊) 등 약 10명의 협의로 결성된 조선지원병 제도 실시축하회에 조종국(趙鐘國)과 더불어 천주교측 발기인으로 참가한 일이다. 이때 발기인은 모두 73명이었다. 이 축하회는 신궁봉고제, 대축하연, 기행렬, 경축탑 설치 등의 축하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러한 경축 무드에 현혹되어 많은 청장년이 지원하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실록 친일파》, 140∼141쪽).

     

    같은 해 10월 20일, 장면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산하의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 44명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이 위원회는 총독부의 강력한 방침으로 제1부 의식주, 제2부 의례·사회풍조, 제3부 부인 생활에 관해서 내핍·근로, 기타 전시 생활 개선 운동을 주관했던 기관이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같은 해 11월 1일부터 43명으로 된 비상시 생활 개선 순회강연반을 전조선 13도에 파견하였는데, 장면은 4명으로 구성된 강원도 방면 순강반(巡講班)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다음해인 1939년 5월 중순, 명치정(일제 시대의 명동성당) 천주교회는 교회 이사인 라리보〔Larribeau, 한국명 원형근(元亨根)〕주교와 장면 등의 지도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하였으며, 이러한 형태를 13도에 확대시키기 위해 명치정 교회당에서 지방교회 대표 60여명을 포함한 교도 1천여 명의 참석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 연맹의 이사장은 라리보 주교였으며, 이사는 노기남, 구로카와(黑川米尾) 등 5명이었고, 간사는 장면과 이와다니(巖谷二郞) 등 7명이었다(이상의 친일행적은 《실록 친일파》, 276∼277쪽, 《역사에 다시 묻는다》, 283쪽 참고).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94540

    나무술 hse***
    뭔 헛소리.. 민주당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고려 국민당과 지주세력들인 한민당의 결합으로 창당한 당이거든.. 한민당이 지주세력이기는 햇어도 친일 관료 세력들은 아니거든.. 해공 신익희 선생은 상해임정 개원부터 해방때까지 김구선생과 같이 독립운동 하신분이고.. 민주당의 초대 대선후보가 이시영 선생님 이시다.. 09.06.14 14:54

    리엘로 fog****
    저희 집안 어르신 중에 유진산이라고 계십니다. 김영삼, 김대중이 속해있던 신민당의 총재셨죠. 그 분은 일본 와세다 유학 시절 독서회 사건으로 형무소 감금되는 등 독립운동가셨고 이후엔 박정희에 맞서 야당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당시 지주였던 저희 집안 전체가 사실 독립자금을 마련하려고 가지고 있는 자산을 팔아 돈을 마련하고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6.25 때 지주 학살했던 북한군도 함부로 손을 못댔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민주당을 단순히 친일파 정당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군요. 08.10.09 05:58

    정의의 물결 wha***
    민주당의 뿌리는 친일파인 한민당 계열이 세운게 맞다..하지만..지금은..그 한민당 계열이 남아있는가?? 더러 한민당 계열이 남아 있기는 하겟지만, 노친네 몇몇정도이고, 대부분 6.3세대나 80년 세대들이다..그런데 한나라당은 어떠한가..이승만의 친일자유당 자손들이 늘 세습하는 정당이 한나라당이다..여기서 친일 정당이 어딘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시덥지도 않은 지식갖고 현실을 호도하려 하지 마라.. 08.10.08 15:35
    리플달기 | 신고하기
    댓글 정의의 물결 wha***
    하다못해...친일 한민당 조병옥의 자식인 조순형 조차 민주당에 명함을 못내밀어서 이회창 밑에서 빌 붙고 있지 않은가!1한민당이라는게, 이승만에 빌붙어서 대한민국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동조해서 꿀물이나 얻어먹으려던 친일 지주들로, 이승만이가 그 지주들이 너무 정치세력이 강해지자 친미 자기똘마니들만 모아서 정권장악한게 자유당이고, 그에 팽당 친일지주들이 야당이라고 만든게 한민당이지... 08.10.08 15:43



    좋은 자료로 생각되는 게시글들 주소: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 - 해방 직후의 김구와 임정법통론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http://jayouropen.egloos.com/4419413



    덧글

    • 아베 2010/05/17 01:25 #

      핵나라당은 친일정당 아닌 거 처럼 얘기를 하냉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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