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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가 맞다 역사 문제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가 맞다

내가 어려서부터 받아온 유신독재정치적 반공교육에 의하면
항일무장독립투사였던 김일성 장군은 나이가 상당히 많은 노인네 장군이었는데
일제패망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은 불과 30대의 새파란 애송이었다.

따라서 그는 "가짜 김일성"이며, 김일성을 자칭하는 그 젊은 소련군 장교는
본명이 "김성주"로서 일제시대 유명했던 항일독립투사 김일성의 유명세를
팔아먹는 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위 "가짜 김일성론"이다.
물론, 김일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전에는 나도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누군가 어제 서프에 올린 글을 보니...
아마 그것이 소위 말하는 "김일성 회고록"이 아닐까 추측되는데
그 책의 정식 명칭이 아마 "세기와 더불어"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글 중에....놀랍게도 김일성 본인이....
자신의 본명이 원래 "성주"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본명이 원래 "김성주"였음을 아마도 속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길림시절 (3장/1-10)

박소심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한숨을 쉬였다. 《내 성주동무 말이니 듣겠소.
하지만 내 인생은 이미 기울었소. 실패한 인생이란 말이요.》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후대들에게 넘겨줄 재산이나 정신적유산도 없었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8874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4장/ 1-10)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8875


위 두 게시글들은 매우 많은 댓글들까지 포함하여 엄청나게 긴 글들이다.
그래서 솔직히 나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저 부분 부분 약간 살펴보았을 뿐이다.

어쨋든, 위 게시글을 읽어보니....당시의 실제 시대상황이 어떠했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느껴 알 수 있었다.

역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월남패망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잘 전달하는 기사 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밑에 황길경님도 이미 지적하고 있지만....
아래 기사를 쓴 필자는....거시적 측면에서의 역사적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묘사를 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보충 설명하고자 한다.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항프무장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들 중에 한 명이 바로 공산당계열 독립투사인 호지명이었고,
프랑스로부터 해방되자, 북베트남그가 세운 나라가 바로  월맹 베트콩이라고 불리던 나라였다.

그에 반하여, 남베트남(=월남)에는 프랑스에 기생하며 매국을 일삼았던 매국노들을
미국이 자신의 꼭두각시 정권 노릇을 하도록 세워두었는데...그것이 바로 티우 정권 등이다.
그래서 남베트남, 즉 패망전 월남사회란.....매국노들의 특성답게 온갖 부패가 만연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그런 매국노들이 기득권을 장악한 사회에서는
사회정의와 도덕성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래서 돈과 권력이 있던 매국노 자녀들은 모두
군대면제를 받았던 것이다.

그에 반하여, 북베트남은 비록 가난하기는 하였지만
독립투사 후예들답게 매우 도덕성이 높은 사회였고
따라서 당시 대부분의 베트남 민중들은 오히려 북베트남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기도 변변히 없던 북베트남, 즉, 월맹 공산당 베트콩 정권이 미국을 무너뜨리고
베트남에서 내쫒아 버리자.....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던 부패한 월남은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즉, 그동안 부패했던 월남의 매국노 세력들이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미국의 후원이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사라지자, 월남이 무너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런데....일부 인간들은 그런 부패한 월남이 망해서 사라졌다고 통탄해마지 않는 것 같은데
오늘날의 공산화된 베트남이....과연 당시의 반공주의 월남 보다 더 못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할 때 오늘날의 베트남은....당시의 월남 보다 훨씬 더 자주독립적 국가가 되었으며
 나아가 동남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것 같다.

(뱀발)
참고로....
아래 기사에 나오는 소위 "보트 피플"들이 대략 100만명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그들이 단순히 월남이 공산화 되는 것이 무서워 도망간 하층 베트남 민중들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부패한 월남시절 미국에 빌붙어 첩자 끄나풀 노릇 등을 해서
베트콩이 들어오면 처단될까 두려워 도망간 것이라고 본다.

즉, 말하자면....
한반도에서 일제시절 일제 "밀정" 노릇을 했던 조선인들 신세와 같은 것이다.
물론, 한반도에서는 "일제 밀정"이라는 매국노들이 처단되기는 커녕 도리어
미군정하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지만.....

따라서 나로서는 그들 "보트 피필"들에 대하여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아래 황길경님 댓글은....원래 저 아래 기사에 대한 댓글로 밑에 붙어 있던 것을
내가 여기로 퍼오면서 위로 올린 것입니다)

황길경
2010/08/22 17:28

위 글은 베트남전쟁에서 월남 패망 당시 주월남 한국대사관 경제담당공사로 근무하던 이대용이라는 사람이 2004년 4월 이전에 쓴 글입니다. 숭미파들이 애독하는 듯 합니다. 이대용은 자기의 경험을 나열하고 있는데, 당시 그가 보기에는 베트남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위의 글에서는 그러한 이상한 일들을 두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담당공사의 직위로 세상돌아가는 이치를 알수는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그는 큰 강물이 어떻게 흐르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내용 중에 당시의 사정과 오늘날의 사정과 비교검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유용한 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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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공산화를 방불케하는 한반도 위기
"월남 패망 현장 목격자의 악몽" 

2004년 4월 이전 / 이대용 

이 글을 쓴 전 이대용 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동안 억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 「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 라고 말했다. 그는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다음은 李회장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달러(20억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 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총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하에 있었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 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월남정부의 각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 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하는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 날 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서,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원비 준장, 제7사단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티우 대통령이 미국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았다.그러나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
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 및 언론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무시한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결국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http://cafe.naver.com/kocoree/14317


아무튼,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김에...
일제해방후 한국현대사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 하나도 소개하고자 한다.(극히 일부만 퍼옵니다)

참고로.....아래 기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게 된다면
백범 김구 선생이 왜 당시에....평양으로 달려가 김일성과 손을 잡으려고 했었는지도
아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에서 미제로- 신탁통치의 진실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 (9)

일제치하의 어린 시절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해가 질 무렵 일제의 주구들이 마을을 덮쳐 집집마다 샅샅이 뒤졌다. 긴 창을 가지고 다니면서 곳곳을 찔러보며 땅 속에 감추어놓은 식량을 찾으려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식량이 나오거나 가마솥에 죽 아닌 밥이 끓고 있으면 주인을 맨 땅에 꿇려놓고 몽둥이로 치는 것도 보았다.

집집에 배당된 공출량이 때로는 수확량보다 많기 때문에 어느 집이나 공출량을 다 낼 수가 없었다. 농사 지어놓은 식량을 이리저리 다 빼앗긴 농민들은 고구마나 수수, 조, 밀을 갈아서 껍데기 채 그대로 쑨 푸데죽을 먹었다. 호박죽, 무밥, 콩나물밥, 실가리밥은 그래도 좋았다.

거름하라고 배급 주는 콩깻묵(콩기름을 짠 찌꺼기인데 타이어 바퀴만 했다. 만주에서 왔다고 한다.)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는데, 그것을 물에 담갔다가 몇 번이고 씻어서 밥을 해 먹었다. 냄새가 역겨워서 목구멍에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먹었는데 먹고 나서는 거의 설사를 했다.

어떻게 근근이 겨울을 난 농민들은(도시에서도 아주 적은 배급량으로 살아갔다) 봄에 풀잎이 나기 무섭게 들로 산으로 가서 나물을 뜯었다. 심지어 논에 나는 독새기풀, 자운영은 말할 것도 없고 보리도 뿌리까지 캐어다 먹었다. 소나무 속껍질(송키)을 벗겨 먹었다.

미국은 조선민족은 통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40년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3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5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국가를 수립하고 문화를 찬란하게 발전시킨 문화민족이 아닌가.

우리 민족에게 통치능력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거짓이며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방 직후에 우리민족은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질서를 잡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이는 우리 민족에게 통치능력이 탁월함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미제는 40년 신탁통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20년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그것도 안 되자 다시 10년 신탁통치를 고집했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5개년 후견제로 결정을 보았다.

이에 미국은 뜻대로 되지 않자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5개년 후견제가 아닌, 5년 신탁통치로 왜곡 보도하면서 우익분자들을 통해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반대하도록 종용했다. 전체 언론기관은 대서특필로 신탁통치 반대 논설을 실었다.

"왜 또 다시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야 하느냐!"

분노한 민중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신탁통치 반대 구호를 외치며 플랜카드를 든 시위군중이 큰길을 메웠다. 군중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이는 외세의 지배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조선인민의 반외세 투쟁의 일환이었다.

며칠 후, 진보진영은 모스크바 삼상결정 원문을 입수하여 그것을 각종 보도기관을 통해서 해설 소개했다. 신탁통치가 아니라 5개년 후견제라는 점, 기간이 오 년이지만 그 이전에라도 각 당, 단체 대표들에 의해서 구성될 임시정부가 자기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 언제든지 협의하여 철수하며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미제와 그 주구들이 외세의 지배를 반대하는 조선 인민의 애국적 열정을 그들 식민지 정책에 역이용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고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각 지역에서 군중집회를 갖고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좌우 어느 쪽이 애국적이며 정당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오늘의 역사는 준엄하게 답변하고 있다.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전 민족이 단결하여 전진했다면 5년 이내에 외세의 지배가 없는 독립국가를 건설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외국 군대가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는 민족적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약소국가 영토 내에, 특히 수도에, 강대국 군대가 주둔하는 조건하에서 독립을 유지한 약소국가가 인류 역사상 어느 곳에 있었던가. 그때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면, 분단으로 우리민족이 당한 극심한 고통과 민족적 손실은 없었을 것이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9월 8일 전까지는 우리민족은 외세의 압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기였다. 민중 자신의 정권인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활동했을 뿐 우익단체란 존재하지 않았다. 미제가 이 땅에 들어온 후 그들의 비호 하에 우익의 당과 단체들이 조직된 것이다. 우익진영의 당과 단체들은 인민위원회와 애국적인 당과 단체들을 파괴하는 것이 활동의 전부였다. 테러도 서슴없이 자행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420




어찌되었든.....

북미관계를 면밀히 주시, 분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국 미국은 북한에 패퇴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원래는....올해 봄에 북미간에 모종의 결단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천안함 사건으로 세월을 흘려보내더니....그래서 나는 올해 8월말 이전에는
물밑협상을 통해서든, 아니면 공식적 협상을 통해서든
북미간 문제들이 큰 틀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예측해온 터인데....

오늘자 기사들을 살펴보니 그에 관련된 기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네요.

결국 미국은 북측이 요구하는 소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며
그것은 곧 미군의 철수를 의미한다는.....사실.

따라서 북미간 상황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돌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남측 정부로서는 필연적으로 조만간 대북화해적 방향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못배기게 되어 있다고
나는 누누히 강조해온 바 있습니다.

참고로 말하면....
대북쌀지원 문제는....."북측 수해천안함 출구" 운운은
그저 명분을 위해 하는 소리에 불과하고, 진실은...
북미관계의 역학관계가 변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결국 한국정부가 머지않아 조만간
대규모 대북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측해왔음도
아마 여러분들은 모두 잘 알 것입니다.

물론, 북미관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동안 대북강경 일변도로만 나가던 한국정부가 어째서 갑자기 대북화해협력적으로
돌변하는지......아마도 매우 어리둥절 할 것입니다.


평양 - 워싱턴 비공식 협의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_2&uid=8960

FP "美, 곰즈 석방 위해 고위급 방북 고려"

http://cafe.naver.com/kocoree/14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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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 "수해 당한 북한에 쌀지원해야"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6579


당정, 대북 쌀지원재개 신중 검토(종합)

한 안상수 대표 9인회의서 제안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00823084822986&p=yonh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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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北 쌀지원 재개”… 정부에 주내 공식 제안

고위당직자 “남북관계 연말쯤 터닝포인트 맞게 될 것”


한나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22일 “이번 주 내에 당 지도부 차원에서 인도적 차원의 대북 쌀 지원을 재개하자고 정부에 공식 제의할 방침”이라며 “대북 쌀 지원 재개는 천안함 폭침 사건 이후 더욱 경색된 남북관계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에서 먼저 쌀 지원 재개를 요청하면 정부의 대북 협의도 보다 탄력을 받게 된다”며 “올해 말쯤 남북관계가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권 내부에선 한나라당 지도부가 사전에 정부와 교감을 갖고 쌀 지원 재개를 제의하는 ‘역할 분담’을 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는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재개하려는 북한과 중국의 외교적 행보에 호응하려는 것 아니냐는 시각과 맞물려 있다.


http://nuri.donga.com/issue/issue_view.php?no=298&cod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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