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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대장"과 월남 응웬 반 티우 대통령 역사 문제

"김정은 대장"과 월남 응웬 반 티우 대통령

김정은 "대장" 임명이 "후계세습"으로서 마치 왕조세습 같다며 비난하는
국내외 찌라시들이 많다.

물론, 세습왕조가 사라져버린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와 같이 적어도 겉보기에나마 "세습"으로 보이는 권력 이양과정이
매우 낯선 것임은 틀림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무조건 "부도덕한" 것인 양 몰아가는 행태도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런 "세습" 운운 하는 자들의 비난은 사실 북한체제를
김정일에 의한 "1인 절대독재체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정말로 김정은 등장이 단지 김정일 독재체제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북측 일반 인민들의 중지가 당대표자회를 통해서 모아진 결과가
그런 것인지는....사실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나로서는 북측사회가 상당한 정도로
"상식적 사고, 합리적 사고"가 통하는 사회라고 본다.

따라서 오늘 김정은이 갑자기 "대장" 직위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북측사회 특성상 그동안 공개가 되지 않았을 뿐
아마도 어쩌면 김정은은 이미 그에 상응한 어떤 "업적"을 충분히 쌓았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본다. 그래서 적어도 북측 권력 내부에서는 김정은의 업적에 대해
아마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그에 반발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정은의 업적이라면....무슨 원흥 과수농장 따위가 아니라
아마도 사방사 황길경님이 묘사한대로 김정일 뇌졸중 시기에
"김정은 대리"(=청년대장) 로서의 역할을 혹시 수행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쨋든.....

순전히 왕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 왕을 세습할 권리를 가졌던 조선시대에서도
세자가 무사히 왕이 되기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음은
요즘 드라마 "동이"를 통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물며, 권력자의 자식이라는 것 하나로 권력이 세습되는 것이 아닌 오늘날에야
단지 권력자가 자식에게 어떤 직위에 "형식적으로" 임명한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실질적 권력자가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예컨데, 한국현대정치사에서도 최규하가 운좋게도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사실상 권력실세가 아닌 그저 허수아비였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화국봉"이라는 자가 한 때 중국 당주석을 차지했었지만
결국 실세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쫒겨나고 말았음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즉, 마찬가지로.....김정일이 오늘날과 같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단지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어떤 직위에 임명해주어서가 결코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즉, 김정일은 그런 권력들을 스스로 운용할 줄 알고, 나아가 주변 권력실세들을
통제할 지혜와 능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김정일이 그러한 개인적 능력이 없었더라면
아마 진즉에 쿠데타로 그 자리에서 쫒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즉, 김정은 대장의 앞으로의 운명도 단지 "세습"만에 의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의 개인적 역량과 지혜에 달린 문제일 뿐이란 말이다.

(뱀발1)

참고로....어느 기사의 일부분을 소개한다.
그리고 나도 아래 해석에 동의하는 바이다.

김정은 `대장` 칭호 의미…黨지도자 성격

軍서열상 3번째 직위지만 黨 지도자 성격이 더 강해

물론 대장이란 칭호가 단순한 `상징적` 의미란 해석도 있다.

차두현 한국국방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군 계급상 원수나 차수도 있는데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은 것은 대장 칭호가 군에서 특정 지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김정은 등이 앞으로도 군에서 근무하며 군을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단지 `대장` 칭호가 김정은이 앞으로 공산당을 이끄는 `지도자(리더)`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mk.co.kr/newsRead.php?sc=&cm=%B1%E8%C1%A4%C0%CF_%BA%CF%C7%D1+%B3%BB%BA%CE%C1%A4%BC%BC&year=2010&no=522829&selFlag=&relatedcode=&wonNo=&sID=302



어쨋든.....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습"이 없는 자본주의하의 권력자들이라고 해서
별로 특별히 더 "도덕적"인 것 같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월남패망 직전의 사실상 월남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응웬(구엔) 반 티우 대통령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이미 지난 나의 여러글들을 통해서
패망한 월남의 현대사는 현재 남한의 역사와 정확히 닮은 쌍둥이 꼴이라고
누차 강조한 바 있음을 염두에 두고....아래 여러 기사와 자료들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책갈피 속의 오늘]1975년 티우 남베트남대통령 사임

“미국은 자기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전쟁 패배의 항복선언)을 우리에게 떠맡기고 도망쳤다.”

1975년 4월 21일.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 구엔 반 티우. 그는 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미군을 향해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그 미군이 마련한 군용기에 몸을 싣는다.

티우를 수행한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금덩이가 한쪽으로 쏠릴 때 나는 소리였다. 미군기는 금괴 2t을 싣고 첫 망명지인 대만으로 날았다.

그는 이란의 팔레비나 필리핀의 마르코스에 앞서 스위스 비밀은행계좌에 이름을 남긴다.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써 스스로 식민주의 사슬을 끊은 게 1954년. 미국이 프랑스 대신 베트남에 끼어든 게 그 즈음이다.

티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미국의 존슨과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지원도 티우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만은 어쩌지 못했으니.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사이공이 함락됐다.

그것은 ‘미국의 세기’라는 20세기의 일대 치욕이었다. 5만8000여명의 미국인과 수백만 명의 베트남 인민이 희생됐다. 비극적이고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미국은 베트남에 1400만여t의 폭탄을 퍼부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세계전선에서 뿌린 양의 2배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베트남전의 최대 딜레마는 ‘도덕적 모호성’이었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의 입장에서 그것은 바로 도덕성의 승리였다.

북베트남의 호치민과 인민들이 습기 찬 정글에서 감자와 밀떡을 먹으며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 때, 남베트남의 고관들과 미군장성들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서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으니!

역사는 이따금 소극(笑劇)을 연출한다던가.

미국으로 망명했던 전 남베트남 부통령 구엔 카오 키가 최근 조국 땅을 밟았다. 티우와 짝을 이뤘던 열혈 반공투사는 이런 ‘전향서’를 냈다.

“베트남전은 외국인들이 펴놓은 멍석 위에서 벌인 동족상잔이었다. 100년 뒤에 그 전쟁을 돌아본다면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234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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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1973년1월27일 미국은 베트남을 떠나기 위해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공으로 키신저와 레둑토 는 노벨상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지명되었다. 그러나 레둑토 는  "베트남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전문만 보낸 채 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위선자인 키신저와는 다르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동양인에게 처음으로 주어지는 노벨평화상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착한 아들을 육군에 보냈더니 미국이 그 아들을 '미라이 학살사건'의 살인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어느 미군병사 어머니의 울부짖음,
만삭의 몸으로 전사통보를 받아들고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오열하는 흑인 미망인

"우리는 정치인들이 가라고 해서 갔고, 싸우라고 해서 싸웠고, 철수하라고 해서 철수했다."
 케산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해병대령 데이비드 론스의 허탈한 독백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금괴 2톤을 가지고 조국을 등진다.

종전 후 남아 있던 미국의 전쟁 물자는 도시와 공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구정권은 철저히 숙청되었다.
그러나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50만 명이 노력봉사장에 배치되었으며, 20만 명에 이르는 고위 공무원과 중견 장교들은 '재교육장 (Re-education Camp)으로 보내졌다.


http://dcn.or.kr/34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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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화 전 베트남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응웬 반 티우. /조선
 

응웬(구엔) 반 티우 [阮文紹, Nguyen Van Thieu, 1923.4.5~2001.9.30]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켜 고 딘 디엠 정권을 전복하고 1967년 대통령이 됐으며 1971년 부정 선거라는 비난을 받으며 재선됐다.  /조선

http://m.blog.daum.net/philook/1571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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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들]베트남 독재자 반티우 前월남대통령

23년 5월 베트남 남부의 닝투안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문화정보도시인 중부 후에에서 공부를 했고,
많은 학생들이 그랬듯이 베트민에 들어가 프랑스와 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궁극 목표가 적화통일이라는 것을 알아챈 티우는 베트민에서 나와 프랑스가 운영하는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반대로 자신이 소속해 있던 베트민과 싸움을 시작했다. 54년 디엔비엔푸전쟁에서 베트민이 승리해 패전병이 됐으나 티우는 남부 월남에서 군인으로 자리를 굳혀 60년대 혼란기에는 오히려 남부 메콩델타의 군사령관이 됐다. 결국 그는 쿠데타의 연속으로 혼란 속에 빠진 월남정국을 수습할 10인군사위원회의 의장직까지 맡게 됐다. 이 자리는 차기 대통령을 의미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미국의 지휘를 받아 전쟁을 수행한 티우는 독재정치로 숱한 지탄을 받았고 특히 71년 재선 때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많은 종교인과 학생들을 가두거나 죽이기도 했다. 원래 불교신자였으나 돈많은 사이공 의사의 딸과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티우는 불교신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티우는 75년 월맹군이 밀고 내려오자 결국 월남을 임시정부에 넘기고 대만으로 도망갔으며 이어 런던을 거쳐 현재의 보스턴에 가 정착했다. 그는 도망갈 때 수많은 금괴를 갖고 나갔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스위스 은행 등에 거액의 계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110021913131&code=10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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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베트남 (두산)

IV. 역사

베트남인의 선조는 중국의 화남(華南)지방에 거주했던 월족(越族)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BC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되어 그 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대(唐代)에는 이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어 이후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게 대승리를 거둔 오권(吳權)이 이듬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19세기 중엽 프랑스가 침입하기까지 베트남은 독립왕국(大瞿越·大越國 등)으로 존속되고 여러 왕조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중국은 여전히 베트남의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18세기 말에는 타이손당[西山黨]의 난(亂)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 17세기 초부터 중부 이남에서 독립적 지위를 누리던 구엔씨[阮氏]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구엔씨의 후손인 구엔푹안[阮映]은 타이손당의 난을 진압하고 구엔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2대 황제 성조명명제(聖祖明命帝)가 선교사(宣敎師)박해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영국과 경쟁하여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그것을 구실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베트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8년(남부에서는 9년)이나 끌었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되었고 같은 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된 결과, 북위 17°선을 경계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다. 제네바협정은 체결 2년 후에 전국 총선거를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 조항은 이행되지 못하였다.

고 딘 디엠의 친미정권(親美政權)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월맹에게 조종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1963년 11월 장군 두옹 반 민의 군부 쿠데타로 고 딘 디엠은 실각하였는데 이때부터 베트남의 정국(政局)은 쿠데타의 악순환에 휩쓸려 무려 10여 차례의 쿠데타를 겪은 후 1965년 6월에는 장군 구엔 반 티우의 정권이 들어섰다. 티우 정권은 1966년 새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967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과 상·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1969년 2월에 공산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65년 8월 ‘통킹만(灣)사건’을 치른 미국은 베트콩의 활동은 곧 월맹의 침략행위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북폭(北爆)을 개시하였다. 베트콩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미군은 소탕전에 직접 뛰어들어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민생안정·농촌건설에 주력하는 ‘평정계획’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이 전쟁에는 동남아시아의 집단방위를 목적으로 하여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타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도 파병하였다. 1969년 2월 공산군이 베트남에 대하여 전면 공격을 개시하자 미국대통령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化)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 1월 미국과 월맹 간의 비밀회담이 계기가 되어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베트남·베트콩·월맹 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공산군은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1월 푸옥빈 성도(省都)를 함락, 점차 베트남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4월에 대통령 티우가 사임하고, 트란 반 후옹을 거쳐 장군 두옹 반 민이 난국 수습의 중책을 맡았으나 대통령 민의 평화협상 제의를 베트콩은 거절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30년에 걸쳤던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렸다.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2910&page=10&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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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엔 반 티우 (베트남 대통령)  [티우]

1967년부터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공화국이 함락되던 1975년까지 재임했다.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45년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베트남 독립동맹에 가입했으나 나중에는 프랑스 식민정권 편에 서서 베트남 독립동맹과 싸웠다.

1954년 베트남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956년 이후로는 고 딘 디엠정권을 위해 일했다. 1963년 고 딘 디엠에 대항하여 일어난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65년 구엔 카오 키총리가 이끄는 군사정권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1967년에는 그해에 공표된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으로 뽑혔으며 1971년에 만장일치로 재선되었다.

티우 정권이 출현하면서부터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티우 정권은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린든 B. 존슨대통령부터 리처드 M. 닉슨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줄곧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1973년 평화협정(남베트남 정부는 다소 불만스러운 가운데 협정안을 수락했음)이 조인되어 미군이 철수한 뒤에도 티우는 계속 권력을 강화했다. 1975년초 공산주의자들이 북부지방을 장악하자 부대를 철수시켜 수도 사이공을 방어하도록 했으나 공산군이 사이공을 포위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결과가 되었다. 티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신이 사임한다면 전쟁을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설득을 받아들였다. 1975년 4월 21일 미국을 비난하는 한 연설에서 부통령 트란 반 흐엉을 지지한다는 사임의사를 밝히고 곧바로 고국을 떠났다. 처음에는 타이완으로 갔다가 뒤에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 보스턴에 정착했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2g2148a


여러분들...

위 여러 기사들과 인터넷 자료들이.....매우 복잡해 보이나요?
그러나 사실은 매우 간단합니다.

즉, 구엔 반 티우라는 인간은.....
처음에는 빨갱이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결국 친프 매국노 육사를 졸업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공산당계열 독립투사를 때려잡는 매국노의 길을 걸었으며
식민지배국 프랑스가 호치민의 독립투쟁으로 쫒겨가자
이번에는 미국에 들러붙어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독재정치를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티우는 그 본질이 기회주의적 매국노였으므로
당연히 미국의 똥개 노릇을 자임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 확전에
그도 열심히 추종을 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월남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북쪽의 독립국가 베트민을 없애버리고자 시도했던 것입니다.

결국 티우는 매국노답게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자국민들을 엄청 탄압하고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독립투사 호치민이 세운 북베트남은
도덕적 청렴성을 유지하는 진정한 민족주의 국가였던 셈입니다.

그런 매국노 티우였으니.....부패와 독재정치, 부정투표 등이 난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타우의 위와같은 행태를 보면....마치 친일매국노와 빨갱이, 극단적 반공주의자를
왔다리 갔다리 했던 박정희가 연상됩니다. 더구나 쿠데타와 독재, 부정투표, 부패 등도
너무나 닮은 꼴이라는 생각에....참 씁쓸해 집니다.

오늘날 베트남이 통일되었다는 말은
결국 역사는......독립투쟁을 했던 세력들에게
통일의 기회를 준 셈입니다.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는 본질적으로 그 땅의 매국노들을 동원하여
그 땅을 지네들 식민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된 부도덕한 제국주의자들임을
위 베트남의 역사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군요.

그런데....위와 같은 북베트남, 남베트남의 역사는
정확히...일제패망 직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정세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현재 한반도 국제정치정세는 또다시
월남패망시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사실을.....여러분들은 알고들 있나요???

(뱀발2)
유대왕 키신저는 자기가 베트남 전쟁을 시작해 놓고
결국 불리해지자 베트남을 버리기로 했지요.
그래서 조용히 북베트남-미국 간 휴전협정(=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빼돌려 버립니다.

멍청한 매국노 티우는.....미국이 결국 자기를 버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월남 패망 직전인 4월경에야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아우성을 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래서 금괴를 들고 튄 것이지요.


(구엔 반 티우 대통령 부부의 방한시 사진 - 박정희와 육영수도 보입니다.)

역사란....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렇게 서로 닮은 사람들끼리 만났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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