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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보는 중국의 핵개발 역사 북한의 군사력

재미로 보는 중국의 핵개발 역사

저 아래 소개하는 글은 어느 조선족이 중국에서 2005년도에 쓴 글로서
내가 중국의 대륙간탄도 미사일 개발역사를 갑자기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검색하는 과정에서 걸려든 좋은 글이다. 좋은 글인데도 조회수도 형편없네요.

중국이 만일....핵개발과 대륙간탄도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아직까지도 중미수교 관계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미수교 커녕.....어쩌면 중국은 아직도 미국, 러시아 등으로부터
온갖 모욕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런데 중국은 핵개발에 드디어 성공을 했고,
나아가 대륙간탄도 미사일 개발에도 성공을 했습니다.

그로써 중국은 비로소 국제정치적 거물이 된 것이지요.
그 전엔....미국 따까리 대만정권이....거대 중국의 행세를 하고 있었지요.
실제로는 별볼 일 없는 주제에 말입니다.

그러다가 중국이 진짜 실세로 국제정치계에 등장하자
대만이 그 전에 차지하고 있던 거대중국역할 자리는 모조리 빼앗겨
중국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핵이란....그와같이 엄청난 국제정치적 무게와 의미를 갖는 물건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간략한 핵개발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1945년 미국 핵개발 성공
1949년 소련 핵개발 성공
1952년 영국 핵실험 성공
1952년 미국 수소폭탄 개발 성공
1953년 소련 수소폭탄 개발 성공
1957년 영국 수소폭탄 실험 성공
1960 프랑스 핵개발 성공
1968 프랑스 수소폭탄 실험
1974년 인도 핵개발 성공

1957년 소련 - 세계최초 인공위성 발사
1958년 미국 인공위성 발사

1959년 중국 핵개발 본격 시작
1964년 중국 핵개발 성공
1967년 중국 수소폭탄 개발 성공
1970년 중국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71년 "핑퐁외교" 및 키신저 극비 방중
1972년 닉슨 중국 방문 - 상해공동성명
1979년 중미 정식수교

1998년 파키스탄 핵개발 성공


1998년 북한 인공위성 발사 성공
2006년 북한 핵개발 성공

각국의 핵개발 역사를 나열해 본 이유는
북핵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다른 나라들의 핵개발과 미국과의 관계와
북미관계는....매우 커다란 차이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 등 다른 나라들과 미국은 영토 문제가 없는데 반하여
북미관계는 바로 한반도 남쪽이라는 영토문제에서 오는 갈등이라는 점입니다.

즉, 북한이 헌법상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북핵문제의 해결이 특별히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만일 북미간에 그와같은 영토문제만 걸려 있지 않다면
미국은 아마도 훨씬 더 쉽게 북핵을 양보하고 북미수교로
나갔을 것이 예측됩니다. 그러나 문제는...영토 문제 때문에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펌) 조선족이 쓴 중국의 핵 주권 확보의 역사


백두산
(chihfz99_****)

북핵을 보면서 중국의 핵무기 역사를 들여다 본다.
중국처럼 북핵도 경제발전의 밑 거름이 될 수도

10년쯤 전에 기차에서 만난 한국인과 한담을 하다가 북조선의 핵무기연구문제가 나왔다. 북핵문제가 불거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중년한국인은 북에서 핵을 가져서는 절대 안된다고 펄쩍 뛰었다. “어린 아이가 칼을 쥐면 어떻게 돼요? 남을 해치고 자기도 다칠 게 뻔한데.”

그는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떠들더니 당시 정계에서 물러난 김대중씨가 권좌에 올라앉으면 위험하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김대중이 미국에 가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민주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어요. 피를 먹고 자란다!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이 피바다가 돼요.”

이제 와서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난 지도 몇 해 지났다. 사실이 말해주다시피, 한국은 결코 피바다로 되지 않았다. 거리를 국민의 피로 물들인 “화려한 경력”은 여전히 군부세력들의 전매특허이다.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 임기 내에 과거사 청산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에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많아졌고 한국의 자랑스럽지 못한 역사에 대한 반성은 아직도 정계의 “뜨거운 감자”다. 그러니까 그 한국인의 두 번째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물론 고명하지 못한 그 예언가의 첫 번째 예언도 맞지 않았다. 미래란 미지수니 글쎄 이담에 “북한 아이”들이 핵무기라는 칼을 쥐고 놀다가 남을 다칠지는 모르겠다. 북조선에서 핵을 가지면 위험하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역사를 몰라서 그러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핵무기가 세상에 나타나 60년이 지나도록 인간의 머리 위에 던진 자는 그런 보수적인 한국인들이 우러러 마지 않는 미국의 코 큰 “어른”들 뿐이다. 그리고 삼천리 금수강산에 핵폭탄 투하계획을 여러 번 세우고 모의실험까지 한 자들도 미국인들이지 북조선사람도, 중국사람도 소련사람도 아니다.

지금 세계에는 핵클럽 성원이 여럿이 되나 북조선처럼 문제가 시끄러워 진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포,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지연정치 등등 복합적인 요소가 겹쳐 문제가 점점 복잡해진 것이다. 북핵을 비난하는 말을 듣노라면 참 귀에 익다. 수십 년전 중국의 핵을 트집잡던 말과 너무나도 비슷해서이다.

맨 먼저 원자탄을 터뜨린 미국은 처음부터 기술을 독점하기 바랐다. 1945년 7월 원자탄 실험성공 보고를 받은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포츠담회의에서 먼저 영국수상 처칠에게 통보한 다음, 스탈린에게 두루 뭉실하게 알려주었다. 위력이 엄청난 폭탄을 실험했다고 트루맨이 말하자 처칠은 스탈린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반파시즘 전쟁이 승리로 끝나게 될 상황에서 그런 무서운 위력의 폭탄이 이제 누구를 겨눌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단 소련인들 사이로 되돌아와서 한 마디 지시했을 뿐이었다. “우리의 연구를 다그쳐야겠네.”

미리 스파이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연구상황을 알았고 또 핵무기연구를 추진해왔던 스탈린은 2차대전 후기에 상규무기로도 얼마든지 독일을 이길 수 있기에 핵에 승부를 걸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스탈린의 지시로 연구가 빨라져 소련은 1949년에 벌써 미국의 핵독점을 깨뜨렸다. 미국은 불쾌하고 불안했으나 비난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소련에서는 “먼저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미국은 이제껏 비슷한 보증을 한 적 조차 없으니 미국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핵보유국가다.

소련의 원자탄이 미국으로 하여금 조선전쟁(6.25)에서 결국 핵무기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데 힘을 냈다는 설은 설득력이 강하다. 이때로부터 핵무기는 뒷날 “공포의 평형”이라고 정의된 전쟁억지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조선전쟁에서 미국 핵무기의 위협에 노출된 중국은 자연스레 핵 연구에 박차를 가했고, 소련은 중국과 이런저런 조약을 맺어 핵의 평화적연구와 무기연구에서 협력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쵸브가 권력을 잡아 대미, 대서방정책을 바꾸면서부터 두 나라 사이에는 금이 실렸다. 흐루시쵸브는 모택동에게 핵무기를 연구하지도 만들지도 말라고 거듭 권했다.

“그거 돈이 엄청 들어가는 물건이니까, 사회주의대가정에서 우리만 갖고 있으면 되지요.”

그 즈음 영국과 프랑스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해 핵클럽의 성원은 넷이었다. 서방 대 동방의 비례는 3:1, 영국이나 프랑스는 냉전시대 미국의 동맹국이었으니 미국은 그들의 핵을 드러내놓고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워낙 줏대가 센 전통이 있어 나토에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미국이 섣불리 걸고 들지 못했다. 허나 미국은 만만한 맹방인 영국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수십 년 통제해왔다. 영국이 구매한 미국산 핵미사일은 미국정부의 허가가 없이는 제 마음대로 쓸 수 없고 미사일을 발사하더라도 미국위성에 의지해 방향을 조절하면서 날아가야 하는 형편이다. 하기에 블래어 정부가 185억 달러를 독자적인 새 핵무기연구에 투입했다 한다. 조선과 이란의 핵무기개발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슬그머니 자기 핵무기를 보강하니 영국정부는 전형적인 이중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판이다.

모 택동은 흐루시쵸브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발전한다고 단정한 그로서는 사회주의대가정이 아무리 사이좋더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또한 대전략가로서 그는 일관적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한두 가지 선진무기가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인정하면서도 필요한 무기의 보유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원자탄이란 이런 물건이다. 지금 세상에서 이 물건이 없으면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이것이 모택동의 생각이었다. 헌데 “모든 제국주의는 종이범이다”라는 명언을 했던 그가 “원자탄도 종이범”이라고 비웃었더니 사회주의진영이 발칵 뒤집혔다. 흐루시쵸브는 그가 보기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모택동에게 원자탄의 위력을 알리려고 진땀을 뺐다.

“모택동동지, 원자탄은 종이범이 아니오. 그게 하나 터지면 사단이 암만 많아도 죄다 재로 변한다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상황을 벌써 알아보았고 소련에서 찍은 원자탄실험영화도 본지 오랜 모택동이 원자탄의 위력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 그는 당시 원자탄이 전략무기로는 안성맞춤이나 전술무기로는 적합하지 않음을 꿰뚫어보았고(전술핵무기가 나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고 지금도 완벽하지 못하다) 또 원자탄의 살상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챘다. 하기에 평생 전쟁공포증을 비웃어온 그는 1957년 가을에 모스크바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

“설사 핵 전쟁이 일어나 중국사람이 절반 죽더라도 나머지 절반은 살아남아 더 잘 살 것이다.”

그는 핵 전쟁이 지구의 말일을 불러온다고 여기지 않았다. 수천 년 중국역사에서 갖은 비참한 사건이 다 일어났으나 인간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 근거로 되었고, 또 굳이 뿌리를 캐본다면 불교에서 세상이 망가지는 겁(劫)이 있은 뒤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의식과 비슷하겠다. 이는 천주교, 기독교, 동정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말일의식과 다르다. 소련이나 동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믿더라도 어릴 적부터 받아온 종교 영향을 털어버리기 어렵다. 모택동의 말은 “설사”와 “라도”가 빠져 “모택동이 중국사람 절반을 죽여가면서 전쟁을 벌이자 한다”는 소문으로 변해 쫙 퍼졌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그만 질겁했다.

“중국은 6억이니 절반이 죽으면 3억이 남겠지만, 핵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수천 만 인민은 완전히 사라진다.”

소련공산당내부에서는 중국을 “싸우기 좋아하는 수탉(지금 중국지도는 닭모양이다)”이라 비난하는 바람이 일었다. 몇 십년 사이에 여러 차례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재기하여 먹고살만하게 된 소련인들의 눈에는 중국이 더는 믿음직한 동맹이 아니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작탄으로 비쳤다. 중소친선조약에 의하면 일방이 제3자의 공격을 받으면 다른 일방이 도와야 하는데 가난하기 짝이 없는 중국이야 잿더미로 되어도 밑질 게 없다손 쳐도 소련이 전쟁에 끌려들어가면 건설성과가 깡그리 날아나지 않겠는가? 또 중국이 핵무기를 가지면 미국이 일본의 핵무장을 허용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이거 안 되겠다. 오늘 핵무기를 주면 내일 어디에 갖다 던질지 알게 뭐냐?’
소련은 워낙 연구용샘플로 주기로 약속했던 원자탄을 주지 않고 핵관련 과학자들을 전부 중국에서 철수했다. 1959년의 일이었다.

중국의 영도자들은 개성있는 말로 핵무기보유를 결심했다.

“장백정이 죽었다고 해서 돼지를 털 달린 채로 먹을 수는 없다.” (국방부장 팽덕회[彭德懷])

“바지를 전당포에 잡히더라도 기어이 원자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내 이 외교부장의 허리가 좀 더 든든해지겠다.” (외교부장 진의[陳毅])

“땔나무를 폭탄 밑에 놓고 불을 지펴서라도 원자탄을 터뜨려야 한다.” (신임 국방부장 임표[林彪])

최고지도자 모택동은 원자탄, 수소탄, 핵잠수함, 미사일의 연구를 결심하면서 “만년이 걸리더라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소련이 핵연구협력을 파기한 시간을 기념해 “596계획”이라고 부른 프로젝트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중국 군대 10대원수의 한 사람인 섭영진(聶榮臻)이 총지휘로 나섰고 제일류의 과학자들이 교단에서 사라졌으며 과학계의 유망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소련과학자들이 알려준 데이터가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수동계산기로 수없이 계산을 거듭해 정확한 수치를 밝혀내는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1964년 10월 16일, 신쟝자치구의 고비사막에서 드디어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아시아에서 터진 세 번째 핵무기이자 아시아인들이 보유한 첫 원자탄이며 또한 유색인종의 첫 원자탄이었다. 대륙의 수억 중국인들은 기뻐 날뛰었다. 물론 대만의 국민당은 잔뜩 겁을 먹었으나 해외의 화교와 중국계들은 국민당처럼 심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어느 나라의 화교는 식당을 꾸리면서 꿇어앉아 서비스를 해왔는데, 중국의 핵무기보유소식을 듣고 더는 남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서방언론은 재빨리 독일인들이 중국핵무기연구를 도왔다는 정보를 퍼뜨렸다. 유색인종이 자체의 힘으로 첨단기술연구를 해낼 수 없다는 백인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의 산물이었다.

언론과는 달리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야 하는 소련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바지런히 연구한 끝에 중국의 원자탄이 무섭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기는 첫 실험에 쓰인 원자탄이 무게를 톤 단위로 계산하는 거물이어서 탑 꼭대기에 올려놓고 터뜨렸으니 비행기에 싣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총알은 있어도 쏠 총이 없는” 비실전용무기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의 원자탄 연구에 가담한 어느 조선족이 설계도를 갖고 조선으로 가버려 다른 조선족들이 죄다 연구에서 밀려났다는 설이 있는데, 설계도를 전부 가질 자리에 있는 사람은 워낙 드물고 당시 중국의 핵무기수준이 낮았으니, 그런 설계도와 데이터가 조선의 핵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중국은 남이야 뭐라 하던 상관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1967년에는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 소형화개조도 착착 진행되어 폭격기에 싣고 떨어뜨릴 정도로 핵무기가 작아졌다. 헌데 처음 수소탄 투하실험을 할 때 뜻밖에도 수소탄이 비행기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조종사는 기지로 되돌아오기를 신청했고 지휘관들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라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빙빙 선회하는 동안 보고를 받은 주은래총리가 “우리의 비행사들을 믿어보자”고 말해, 비행장을 완전히 비운 상태에서 수소탄을 실은 비행기가 안전히 착륙했다. 이렇게 위험한 고비를 겪기는 했으나 투탄장치를 고친 다음 두 번째 실험에서 성공을 거두는 등, 중국의 핵무기는 위력이 점점 무서워졌다.

미국과 소련은 극도로 불안을 느껴 외과수술식타격을 연구했다. 1969년에 소련에서 중국의 핵무기기지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흐르니 모택동은 새로운 핵실험으로 대응해 소련의 위협을 해소했다. 말하자면 너희들이 우리의 한 두 곳을 치더라도 우리는 반격할 힘이 남아도니까 해볼 테면 한판 해보자는 배짱이었다. 그 전술이 성공해 소련도 미국도 중국을 건드리지 못했다.

중국은 그 뒤 1970년 4월에 인공위성발사에 성공해 원거리타격능력이 크게 늘어났고 뒷날 핵잠수함연구도 열매를 맺어 강대한 기동타격력을 보유했다. 이론상으로는 이제 만약 중국이 남의 선제공격을 받아 초토화되더라도 핵잠수함에 실은 핵무기로 적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이른바 “2차타격 보복능력”을 가진 것이다. 때문에 이성을 잃은 자가 아니고서는 중국과 싸우려는 결심을 내리기 어렵다.

모 택동은 생전에 미국인들을 보고 “당신들은 핵무기가 있지만 우리는 없다”거나 “당신들의 핵무기는 이것(엄지손가락)이나 우리의 핵무기는 요것(새끼손가락)”이라고 이야기해왔다. 미국의 핵무기창고에 비기면 중국의 핵무기창고에 든 것이 아주 적다는 의미였다. 소련이 미국과 경쟁적으로 핵무기개발에 매달린 것과 달리, 모택동은 시종 핵무기를 전략용으로 삼아 상대방을 타격할 정도, 상대방에게 겁을 줄 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적국을 열 번 초토화하는 비용과 한 번 초토화하는 비용은 차이가 많이 나지만, 효과는 똑 같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또 열 번 초토화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지금 와서는 중국에서 전술용핵무기를 개발해 보유하고 있으나 절대 핵무기경쟁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모택동의 원칙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중국 다음으로 핵클럽에 들어선 나라는 이스라엘. “핵무기보유를 승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정책”으로 일관하는 이스라엘은 1973년의 중동전쟁 초반에 패전을 거듭하니 핵무기사용을 심각하게 검토했다 한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보유를 뻔히 알면서도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핵무기실험에 성공했다는 설이 있는데 확인하기 어렵고, 이라크의 핵시설이 1980년대에 이스라엘공군의 폭격으로 박살나 싸담 후세인 대통령의 핵무기꿈이 거품으로 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64년부터 34년동안 공식적으로 핵무기보유를 선포한 나라가 없다가 1998년에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연거푸 핵무기를 터뜨렸다. 파키스탄의 핵은 이슬람권의 첫 핵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데, 인도의 핵은 거기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기 힘들다. 미국과 서방나라들이 처음에는 비난을 퍼부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특히 파키스탄은 몇 해 후 미국이 주도하는 반테러전쟁의 친밀한 맹방으로 부상해 핵 확산문제가 기사화될 뿐이지 핵무기철폐압력은 받지 않는다. 남아시아의 두 강국은 모두 핵무기를 가졌기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퍽 줄었고 감정적으로 싸움을 벌일 확률도 낮아졌다.

핵클럽 성원국들이 늘어난 지금에 와서 중국의 핵무기역사를 돌이켜보면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지도부의 핵보유결심이 얼마나 정확했느냐를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등소평이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에 “대전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 경제건설에 전념하도록 중국의 발전방향을 새로 잡았는데, 그 전에 “양탄일성(兩彈一星)”이라고 줄여서 말하는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중요한 것은 미사일기술)을 가져 나라를 안전히 지키는 능력을 확보하지 않았더라면 마음 놓고 경제를 춰세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탄일성”의 성공은 근대에 와서 서방열강에 늘 얻어맞은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노벨상수상자인 재미물리학자 양진녕(楊振寧)박사는 1970년대에 중국을 방문해 옛 동창생 등가선(鄧稼先)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핵무기 연구팀에 외국인이 있었는가고 질문했다. 등가선은 “양탄원훈(兩彈元勳)”으로 불리는 핵무기 연구 일등공신이었다. 양진녕은 재능있는 과학자인 등가선이 원자탄연구에 참여했으리라고 짐작해 물은 것이었다. 핵무기에 관한 모든 것은 최고급기밀이라 등가선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주은래총리에게 청시했다. 주은래가 사실대로 알려주라고 지시해, 등가선은 양진녕에게 중국의 핵무기는 전부 중국인들이 연구해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양진녕은 화장실로 달려가 한바탕 시원히 울었다. 양진녕은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고 해외에서 수십 년 살면서 개인적으로는 높은 영광을 누려왔다. 허나 중국공산주의자들이 거둔 성과에 그처럼 공감한 것은 민족의식 때문이 아니겠는가?

핵클럽 성원 가운데서 중국은 유일하게 핵무기보유와 함께 두 가지를 담보해 지켜온 나라다.
“전쟁에서 먼저 핵무기를 쓰지 않고 핵이 없는 국가에 대해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

필자가 만나본 어떤 중국군인들은 이런 담보가 스스로 손발을 얽어매는 어리석은 짓이라면서 불만스러워한다. 강대국의 제1차타격능력이 극대화된 현실에서 이런 담보는 사실 아주 위험하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당당히 윗자리를 차지한다. 또 이제 중국에서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면 대만과 싸울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대만은 중국의 영토로서 하나의 국가가 아니기에 위의 담보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대만사람들은 이 점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에 핵무기를 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작은 전술용 핵무기라도 오염이 심하니까 통일을 궁극목표로 삼는 중국지도부가 사후 통치에 불리한 오류를 저지를 리 없기 때문이다.

중국 군대가 신쟝의 사막에 핵탄두장착이 가능한 미사일을 날려보내며 훈련하는 것은 상례로 된지 오래고 그 누가 트집을 잡지 않는다. 헌데 북조선의 무기는 단거리미사일마저 떠들썩한 쟁론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금까지 핵클럽에 들어온 나라들이 누구의 허가를 받으며 들어오지 않았고(영국만은 미국의 허가를 받았다) 세계가 번번이 사후에 기정사실을 받아들였는데도 북조선의 핵무기만은 여기저기서 가져서는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고 가졌더라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놓은 이유는 많으나 설득력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보인다.

핵폭탄 실험을 치르지 않고 핵무기보유를 선언한 유일한 나라 조선, 그 위력과 잠재력을 얼마나 충분히 이용하는가는 두고 보아야 할 노릇이다. 중국은 핵을 보유했기에 전쟁 걱정없이 지금 마음놓고 경제개발을 하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으로서 필자는 조선의 핵,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이 가진 첫 핵이 중국의 경우처럼 조선경제건설의 튼튼한 담보로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은 핵무기 매듭을 어떻게 풀든지 연구개발비용의 백 배, 천 배, 만 배의 이익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북조선지도부가 98년 ‘금창리 사건’이나 94년 ‘북미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보여준 외교전 능력과 수십년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이 꼭 불가능해 보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2005 05 15 중국에서 글쓴 이 bocelli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4&articleId=10807





(군부대에 갔으면서도 군복을 입고 있지 않은 점이 눈에 띄네요. 군대도 안간 아무개씨들은 군복 입는 것을 엄청 좋아하던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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