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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입양아 출신 윤주희 굴곡진 삶 한국의 해외동포 현황

한국인 아동들의 해외입양을 주도하고 있는 홀트아동복지회.....
솔직히 나는 그 단체가 하는 일에....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는 그 단체가 하고 있는 일들의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그런데 홀트아동복지회의 해외입양사업은 과연 순수한 휴매니즘적 차원에서만 하는 사업일까???
아니면, 입양아 당 얼마씩 받고 있는 돈벌이 때문일까???
그리고....홀트아동복지회는 어째서.....한국정부와 한국사회에 대해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이제 한국도 충분히 "선진국"이 되어, 한국에서 양산된 고아들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문제는 한국사회 자체내에서 해결하라고......
그리고 한국도 이젠 그 정도 숫자의 고아들을 돌볼 수 있는 정도의 국가예산은
얼마든지 가볍게 확보할 수 있는 "선진국"이 되었다.
따라서.....이제 한국 아동들을 해외로 입양보내는 일을....법률로써 금지해야 마땅하다.
그대신 국가예산으로 고아들을 잘 돌보거나, 아니면, 국내입양에 주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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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네덜란드 입양아 출신 윤주희 굴곡진 삶 고백
[여성동아 2007-09-27 12:21:02]
여섯 살 나이에 네덜란드로 입양됐던 윤주희씨(32)는 처음 6, 7년 동안 엄마아빠가 자러 가기 전에는 잠들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의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듯이 또다시 버림받을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런 불안함은 어린 시절 내내,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윤씨를 따라다녔다. 자신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를 가져왔고, 끝도 없이 음식을 먹어치우다 어느 순간 억지로 토해내는 폭식증으로 나타났다.

윤씨는 지난 2004년 네덜란드에서 폭식증 경험과 병을 이겨낸 과정을 담은 책 ‘드디어 진짜 생이 시작되었다’를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인구 1천6백여만 명인 네덜란드에서는 1만 부가 팔리면 베스트셀러로 치는데 그의 책은 3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네덜란드에서도 폭식증을 고백한 책은 제가 쓴 것이 처음이었거든요. 폭식증은 알코올 중독처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인정해야 고칠 수 있는 병인데 모두들 창피해서 감추죠. 제 책이 나온 이후로 폭식증을 털어놓고 치료를 받았다는 여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책은 많이 팔렸지만 돈은 별로 벌지 못했다고 한다. 인세로 받은 돈은 하루 종일 먹어치워야 했던 음식을 사들이느라 진 빚을 갚는 데 거의 다 썼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국 돈 10만원어치 음식을 사서먹다 보니 빚진 돈이 3만 유로(약 3천8백만원) 정도 됐어요. 마약 중독이랑 다를 바 없어요. 돈이 없으면 빚을 지거나 훔쳐서라도 음식을 사 먹어야 해요.”

윤씨는 한국의 친부모가 이혼하고 어머니가 재혼한 후 외할머니의 손에서 여섯 살까지 자랐다.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났음에도 그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엄마의 두 번째 결혼식 날, 외할머니와 이모, 외삼촌과 심지어 사촌동생들도 다 결혼식에 갔는데 혼자 집에 남아 종일 울었던 기억, 아주 가끔 딸을 보러 오다 외할머니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뒤로 다시는 오지 않던 아버지, 어머니가 재혼 후 낳은 아기와 놀다가 어머니의 남편이 일터에서 돌아오기 전에 부랴부랴 도망치듯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던 날들, 2주 동안 미국여행을 갔다 오라더니 영영 네덜란드로 보내져버린 날, 비행기 안에서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다 지쳐 겨우 잠들었던 외롭고 무서웠던 그날도 물론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네덜란드행 비행기 안에서 울다 지쳐 잠든 기억 어제처럼 생생해

네덜란드에서 윤씨를 맞아준 어머니는 새 딸을 위해 매일 밥을 지어줬다. 첫해 여름에는 밤마다 딸이 한국에서 입고 온 원피스를 세탁해야 했다. 외할머니와 한국의 어머니가 다시 데리러 왔을 때, “그들이 찾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윤씨가 그 옷만 입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네덜란드어가 늘어가고 새로운 가족에게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 한국의 어머니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됐다. 그럴수록 새로운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해졌지만 부모가 그들의 친딸인 언니보다 자신을 더 사랑할 리 없다는 무력감이 늘 그를 절망스럽게 했다고 한다.

“두 살 많은 언니는 간식을 먹고 싶을 때면 언제나 쿠키나 사과를 마음대로 집어 먹었지만 저는 먼저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아침에 딸들을 깨울 때, 윤씨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일어나라고 고함을 치는 어머니가 언니에게는 볼에 키스를 해주고 귓가에 일어날 시간이라고 속삭이는 것도 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윤씨가 열 살이 됐을 무렵 네덜란드 아버지의 학대가 시작됐다. 아버지는 치약을 옷에 묻혔다든가, 세수 후에 세면대의 물기를 잘 닦아내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어린 그에게 폭언을 퍼부었고 고아원에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했으며 나무막대기와 회초리로 매질을 가했다.

“화장실에서 혼자 기도하곤 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때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어요.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아빠를 화나게 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했지요.”

자신이 매 맞아 마땅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나쁜 아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 커져갔던 것이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어린 딸의 몸을 “성인 남녀가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만지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적 학대는 그에게서 모든 자존감과 자신감을 앗아갔다. “행복해서도 안 되고 사랑받아서도 안 되는 존재”인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해 최소한의 먹을 것만을 취하는 음식 장애가 나타났다.

그는 열두 살 즈음부터 섭식 장애와 함께 혼자만의 세계로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거부하고 하루 종일 체중감량에만 매달려 28kg이라는 한계상황적인 몸무게에 이르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이러다 죽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냉장고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을 입 안에 집어넣으며 달래는 폭식에 빠지기를 반복했다.

한국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몇 번의 편지를 보낸 끝에 가족들과 마침내 연락이 닿아 한국을 방문한 건 열일곱 살 때였다. 10년 만에 만난 부모님과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줬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후로 폭식과 거식을 되풀이하며 한국과 네덜란드 사이를 핑퐁처럼 오갔던 방황의 시작이었다.

“네덜란드에 있으면 한국이 그립고 그래서 한국에 와서 살다 보면 다시 네덜란드 식구들이 보고 싶어졌어요. 그건 중독자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지금 여기 말고 다른 곳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착각을 안고 살거든요.”

결국 네덜란드에서 치료를 시작한 스물일곱 살이 될 때까지 윤씨의 폭식증은 점점 심해졌다. 아침이면 커다란 여행 배낭을 등에 메고 집을 나서 여러 군데의 가게와 슈퍼와 빵집을 돌며 가방을 가득 채웠다. 음식물로 가득 찬 위가 찢어져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감이 밀려올 때까지 먹고 난 뒤에는 화장실 변기 위에 머리를 처박고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고 음식물을 토해냈다. 하숙집에 살 때는 너무 잦은 화장실 출입이 눈치 보여 방 안에 쓰레기봉지를 준비해놓고 하루 종일 토한 다음 한꺼번에 화장실에 가져다 버리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온종일 거리를 배회하며 먹고 공중화장실을 찾아 토하면서 불행해지면 불행해질수록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는 안정감을 느꼈다. 적어도 그 안정감이라도 얻으려면 먹고 토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폭식증은 마음의 병이에요.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처럼 사랑받고 행복해질 자격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죠.”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에 떨어져 있던 자존감을 길어 올리는 치료과정에 4년이 걸렸다. 폭식증 치료센터에 등록해 하루 세 끼를 클리닉에서 해결하고 상담치료를 병행했다. 밤에 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대다 치료를 중단하기도 여러 번. 그래도 차츰 치료기간이 늘어갔다. 그러는 사이 네덜란드 아버지의 폭력을 마침내 어머니에게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전폭적으로 딸을 믿어줬고 윤씨가 필요로 했던 신뢰와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그뒤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낯선 입양아에게 아버지로서의 감정적인 유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나약한 인간이었을 뿐이라 결론 내리고 용서하기로 했다.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제 자신이 폭식증에서 헤어나올 수 없으니까요. 가해자를 미워하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억울하고 불행한 피해자로 머무는 것이지요. 용서를 통해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게 됐어요.”

해외 입양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해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혀온 마음의 병에서 벗어나자 삶의 목표도 보였다. 지난 1월 한국으로 오는 다섯 번째 여행길에서 그는 “이제 앞으로 내가 살 곳은 한국”이라고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자신처럼 섭식 장애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한국에는 폭식증 환자가 많지 않다고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뿐 많이 숨어 있을 거예요. 한국 여자들도 다이어트 강박증이 심한데 다이어트와 폭식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는 증상이거든요.”

또 한 가지 그가 힘을 보태고 싶은 일은 ‘국내 입양’ 홍보운동이다.

“흔히 선진국에 보내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큰 오해예요. 부모만 잃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 한국 문화, 정체성 모두를 잃게 되죠.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얼마나 큰 혼란과 슬픔을 겪게 되는지 널리 알리고 싶어요.”

윤씨는 요즘 매일 다일공동체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노인들에게 무료급식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야채를 썰고 감자를 깎아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음식의 소중함, 나눔의 기쁨을 느끼는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했다.

“폭식증과의 길고 고통스러웠던 싸움에서 이긴 저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워요. 이제는 힘들었던 과거도 사랑할 수 있어요. 그 과거가 오늘의 강하고 현명한 저를 만들어줬고 그 모든 경험이 결국 제 삶의 일부분이니 사랑하고 긍지를 가질 수밖에요.”


기획·김명희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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