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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안두희와 박기서 백범 김구 선생

[사설]안두희와 박기서
[한겨레]2006-10-24 01판 29면 1276자 사설
꼭 10년 전 일이다. 박기서는 안두희에게 물었다. “네가 안두희냐?” 도피와 병마에 지친 늙은 안두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렸으나, 자신이 안두희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박기서는 ‘정의봉’을 꺼냈다. 순간 종교적인 번뇌가 스쳐갔다. 버스 운전으로 겨우 꾸려가는 가정형편과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결국 박기서는 정의봉을 휘둘렀다. 그는 ‘겨레와 조국에 죄를 지은 자가 하늘이 주는 수명을 다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정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안두희는 허망하고 처참하게 숨졌다. 1996년 10월23일이었다.

육군 소위이던 안두희는 1949년 6월26일 백범을 암살하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헌병 지프에 실려가서 무기형을 받았다. 그의 수감생활은 고기, 술, 담배가 원없이 제공되는 호화판이었다.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했고, 전역 후에는 검은 세력의 비호 아래 군납업에 손을 대 한때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만큼 큰돈을 만졌다. 자유당 붕괴 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부인과 위장이혼하고 가족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자신도 이민을 시도했다. 그는 백범 암살에 관한 일들에 대해 끝내 거짓과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다. 죽음은 종국에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안두희의 죽음은 극적 상징성을 띤다.

박기서는 성당에서 자수했다. 그리고 법이 정한 대로 형을 살고, 예전처럼 운전대를 잡고 살고 있다. 그가 그날 한 일을 두고 개인이 개인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가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저버리고, 개인적인 응징을 결심하고 실행할 때까지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그가 그날 한 일은 음모와 거짓과 침묵으로 점철된 거대한 악의 구조에 온몸을 던진 도전장이고, 불의에 면역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제발 진실을 향해 눈과 귀를 열라는 피맺힌 절규에 다름 아니다.

박기서가 안두희를 난생처음 만나고 영원히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다. 강산이 변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은 여전히 완악하고 진실은 아직도 멀리 있다. 이제라도 백범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은폐했던 검은 세력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겨레의 자긍심을 살리는 일이고, 역사의 진실을 찾아나가는 일이고, 또다른 박기서를 만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선동/예원학교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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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출생지 평북 용천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백범은 순국하고, 이 사건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의혹을 낳았으나 그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였다가, 1951년에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예편되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그뒤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4·19혁명 이후 김구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1961년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저서에《시역의 고민》(1955)이 있다.
본문
평북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93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편입했다. 그뒤 중국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활발한 우익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활동으로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18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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