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와이드(336x280)_상단 2개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 매국노 안두희에 대하여 백범 김구 선생

그림:박재동, 한겨레그림판
(백범 김구)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나중에 비밀해제된 미국의 문서에 의하면, 안두희는 미국 cia 끄나풀이었다고 한다.)
(일제식민지로부터의 일제해방 후의 미군정통치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해야만 비로소
당시 미국의 백범 김구선생에 대한 태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이 현재 이라크에서 벌이고 있는 일은, 이라크에 꼭둑각시 정권을 세워
배후 식민통치하는 것이다. 이라크 점령 미군정은 바로 그런 꼭둑각시 식민통치를 위한 정지작업과정이다. 해방후 남한에서도 정확히 같은 작업이 주한미군에 의해서 벌어졌다. 즉, 미국은 남한에 자기들의 식민지 정권을 세우고자 시도했던 것이며, 또한 성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외세지배를 물리치고 완전한 자주독립을 원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 미국의 눈에는 가시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
백범과 미군정과의 갈등


백범과 미국의 관계를 암살사건에만 국한하여 볼 때, 안두희 등 관련자들의 증언이 더 이상 제시되지 않은 한 현재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그러나 백범과 미국과의 전반적 관계는 앞으로 중요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암살사건의 배경과는 별도로 해방 후 백범사상의 추이와 한국 현대 민족주의의 이념정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들은 미국인과 상당한 정서적 차이가 있고, 정치행위의 패턴 또한 다르지만, 해방이후 서로 대립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백범과 미군정은 해방이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국가건설의 근본노선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으며, 이로해서 점차 갈등과 대립의 관계로 변화하였다. 해방직후가 차이를 내재한 우호적 관계였다면, 1945년말 이후 1947년까지는 과도정권수립문제로 임정법통론과 군정강화론이 갈등을 빚던 시기, 1948년 이후는 정부수립문제로 통일정부와 남한단정이 대립하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일제하 백범과 임정은 미국과 친밀한 중국 국민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 임정 산하의 광복군은 OSS와 합동작전을 위한 훈련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였고, 해방을 맞아 백범은 1945년 9월 2일 [14개조 당면정책]을 발표하였으며, 그 중에서 핵심은 임정법통론의 국가건설방안이었다. 임정법통론의 구체적 내용은 1) 중경임시정부의 정권 접수, 2) 임정주도의 민족대표회의 소집에 의한 과도정권 수립, 3) 선거에 의한 정식 정부 수립의 3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자격을 유지하면서 국내에 들어가는 것이 임정법통론을 펴기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미군정은 국내 다양한 정치세력을 미군정주의에 묶어 세우려고 이승만을 귀국시켰으나 별 효과가 없자, 우익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는 임정요인들의 귀국을 극도의 보안 속에 추진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정법통론에 대한 인정, 그 첫걸음으로서 임정자격으로의 귀국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때문에 미군정은 11월 19일 엄밀히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며 귀국후에도 '정부로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하여 백범으로부터 받게 된다(HUSAFIK 2권).

임정법통론이 첫걸음부터 미국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사태진전에서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백범은 귀국 후 정세를 관망하다가 모스크바삼상회담에 대한 반대운동과 더불어 [國字 1호] [國字 2호]의 포고령을 발표하고 임정의 정권접수를 선포하였다.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라 규정하고 초기에 제압하였으며, 하지는 백범을 불러 질책·경고하였다. 미군정은 채 자리잡히기 전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해서 미군정은 백범과 임정을 경원시하였고, 미군정을 지지해준 경찰을 더욱 신뢰하였다.

장덕수 암살사건 계기로 백범·미군정 대립임정법통론의 1단계는 좌절되었지만, 좌익이 우세한 상황에서 우익들은 전반적으로 임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즉 임정은 미군정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거부되었지만 다수 우익에게는 사실상 인정받고 있었다. 따라서 김구는 임정주도하에 정권수립의 2단계로 우익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지역대표가 포함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이를 과도정권수립을 위한 입법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승만의 협조와 굳펠로우의 '재치있는 노력'으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하지사령관 개인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대표의원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계열은 "임정을 알로, 비상국민회의를 유충으로, 민주의원은 번데기로 여기며 여기서 장래의 정부인 나비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FUSAFIK 2권), 미군정은 임정과 비상국민회의를 환골탈퇴하여 미군정의 기반확대에 동원하였던 것이다. 김성숙선생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민주의원 편입을 [오호 임정30년 만에 해산하다](『월간중앙』 1968년 8월)라고 통탄 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임정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하려는 백범진영과 미군정의 확대강화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갈등은 심상치 않았으나, 당시 좌익에 대한 비슷한 입장 등 공통성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미군정과 백범진영의 관계는 대립이라기 보다는 갈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1947년 후반기 이후 미군정 및 단정세력과 남북합작을 주장하는 백범진영의 대립은 국가체제의 차이가 개재된 근원적인 대립으로 비화되었으며, 그것을 증폭시킨 것은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한 미군정과 경찰의 백범에 대한 '전쟁과 같은 공격'이었다.

당시 한민당 정치부장이며, 미군정과 가장 절친하며, 유엔에 가장 우호적인 정객의 한 사람인 장덕수의 죽음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악재'였다. 유엔에서 한국문제 처리를 고대하고 있던 미군정은 유엔임시위원단의 입국과 안전한 활동을 보장해야할 중요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라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고, 조병옥 장택상 등 한국인 경찰수뇌부도 한민당과 가까왔기 때문에 매우 공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장덕수사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 이전 송진우·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한 소극적 입장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하지사령관은 암살범을 미국인에 대한 공격을 주로 처리하는 군사재판에 회부하였고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하지사령관이 말한 군사재판이란 1946년 10월 대구폭동에 대한 군사재판과 같은 비중임을 밝혔다.


남북합작 주장으로 미군정의 표적돼


미군정장관 하지는 여운형암살사건의 배후도 백범으로 내심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병옥은 범인의 배후가 4단계라고 밝혀 그 정치적 파장을 예고하였으며, 장택상은 김석황의 검거에 이어 배후로 김구를 은연중에 지목하였다. 결국 뚜렷한 증거도 없이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은 유일한 대의기관으로 자부하던 임정계의 국민의회는 사실상 불법단체화되고 간부들이 다수 구속되었으며, 미대통령 트루만의 메세지에 의해 김구는 군사법정에서 아들과 같은 미군중위에게 취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1948년에 들어와 단정수립이 표면화되자 백범은 2월 10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으로 '해방'이 오히려 '분단'을 가져왔음을 통탄하며 미군정과 분단세력을 비판하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백범의 통일노력을 한민당은 '모스크바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 매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범은 남북합작을 주장하며 연석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이제 분단노선과 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로 접어들었다.

연석회의 이후 한독당은 다소 분열되기도 하고 조소앙은 사회당을 만들어 선거에 참여하였으나, 조완구 엄항섭 등 백범직계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단정에 계속 반대하였다. 백범은 통일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계속하였고, 1948년 분단반대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서한을 김규식선생과 공동으로 작성하여 서영해를 통해 유엔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우익 '3영수' 중 두분이 참여하지 않은 이승만정권의 불안한 기반, 국회 안팎에서 제기되는 민족통일에 대한 요구, 그 자리에 백범이 태산같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철군완료를 앞둔 시점에서.

미군정 또는 단정세력과 대립적 관계였다는 것이 암살사건과 직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백범의 삶과 죽음은 그의 사상 및 통일론과 결합하여 검토하여야 보다 온전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백범 암살의 동기는 친일과 민족, 좌익과 우익, 정치인의 정치적 경쟁 등 여러 변수들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포괄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틀은 역시 분단과 통일의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현대 한국 민족주의의 과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
얼마 전에는 선생님을 저격한 안두희가 버젓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분개하던 한 시민(박기서씨, 50)이 ‘정의봉’이라 쓴 몽둥이로 그를 살해(’96. 10. 23)하면서 “말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이 있어야 정의가 바로 선다”,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안두희 응징'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은...
[오마이뉴스 2003-11-27 11:11:29]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네 발의 총성으로 허물어진 민족정기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서대문 네거리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에서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 총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지도자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운명했다. 그 총소리와 함께 민족정기도 허물어져 버렸다.
범인은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 그는 달려드는 비서들과 경비순경들에게 여유 있는 태도로 “선생은 내가 죽였다”며 권총을 든 채 손을 들었다. 잠시 후 안두희는 헌병대로 연행됐다.
암살범 안두희는 줄곧 단독 우발 범행을 주장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했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6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고, 1950년 6월 28일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백범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 원내는 권중희씨로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안두희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중 1987년 정의의 이름으로 테러를 가한다
http://blog.paran.com/fjj7efk9/13340385

null



바보들의 영문법 카페(클릭!!)

오늘의 메모....

시사평론-정론직필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sisa-1

바보들의 영문법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babo-edu/

티스토리 내 블로그
http://earthly.tistory.com/

내 블로그에 있는 모든 글들과 자료에 대한 펌과 링크는 무제한 허용됩니다.
(단, 내 블로그에 덧글쓰기가 차단된 자들에게는 펌, 트랙백, 핑백 등이 일체 허용되지 않음.)

그리고 내 블로그 최근글 목록을 제목별로 보시려면....
바로 아래에 있는 이전글 목록의 최근달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목을 보고 편하게 글을 골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블로그내 글을 검색하시려면 아래 검색버튼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가가챗창

flag_Visitors

free coun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