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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인디언의 피를 먹고 핀 자본의 왕국 인디헤나(원주민)

qkqh
기독교 박멸..에메리카대륙으로의 마지막 이주는 4천년전쯤이라고 합니다.
옛날 고조선시대라고 합니다.
남미에서는 7천만명 인디언이 학살되고,
북미는 4천만, 물소들도 6천만두이상 학살했다고 하더군...
기도교 박멸.. 08.12.16 IP 147.6.***.61


  • 경제토론 달러의 정치경제학-인디언의 피를 먹고 핀 자본의 왕국 [3]
  • 공돌이 공돌이님프로필이미지   번호 449449 | 2008.12.16 IP 119.65.***.16    조회 505 주소복사


지금 미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한 괴물로 인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요동치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2위 업체인 뉴센트리파이낸셜(New Century Financial)이 파산을 신청했고, 원리금을 갚지 못해 은행에 빼앗긴 주택이 수십 만 채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금융그룹인 씨티그룹(지난해 4분기에만 10조원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손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50억 달러에 달하는 모기지 관련 손실) 등 미국 내 금융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IKB은행), 영국(노던록) 등 전 세계 금융시장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급기야 1929년 대공황에도 끄덕없었던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파산하면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국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그 힘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미국이 세계 제일의 경제 강국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발달했고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까지 얻으면서 세계를 지배해 온 영국을 물리치고,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백 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국이 어떻게 대영제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에 등극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전 세계를 달러의 발 아래 둘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데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 잡아 나가는 과정과 함께 애초부터 패권적 욕심과 불합리함을 안고 출발했던 달러 체제가 힘을 잃어 나가는 과정을 동시에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달러’라는 경제적 힘은 ‘핵’이라는 정치군사적 힘과 맞물리면서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치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은 그 자체가 한 몸통인 제국주의 패권의 쌍두마차이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한국경제, 나아가 세계경제가 한 치의 진보적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 여상경

 

 

   1부 인디언의 피를 먹고 핀 꽃 자본의 왕국, 아메리카

 

 

면적 951만 8,323㎢로 남한의 100배에 해당하는 땅덩이에 3억 명이 살고 있는 나라. 2007년 기준으로 명목 국내총생산(GDP) 13조8,440억 달러로 한국(9,570억 달러)의 15배 규모를 자랑하며, 캘리포니아 주 하나만 따져도 GDP 2조1,500억 달러로 프랑스와 맞먹는 나라. 캘리포니아 외에도 텍사스, 플로리다, 일리노이, 뉴저지 등 한국보다 경제규모가 크거나 버금가는 주만 해도 몇 개를 꼽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기획연재의 첫 번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경제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흐름을 좌우해 왔던 각종 정책과 기구의 설립 등은 미국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순례자들(필그림스 Pilgrims)’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현재의 미국 땅에 도착한 1620년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의 미국경제가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개인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듯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작동하는 시스템과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 역사적 과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학살의 신세계 교향곡

 

아메리카 대륙이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산살바도르(San Salvador) 해안에 발을 내디딘 이후부터입니다. 우리가 배운 역사책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은 신대륙 탐험에 나선 모험가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수천만에 이르는 원주민(‘인디언’이라는 말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했던 콜럼버스가 붙인 이름입니다)들이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2만여년 전에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통해 알래스카를 거쳐 아메리카 전역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수만 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을, 서구인으로는 최초로 콜럼버스가 방문1)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유럽인들의 주장처럼 ‘야만인’이 아니라 엄격한 사회규율 속에서도 개인의 가치가 존중되는, 유럽보다도 훨씬 평등하면서도 수준 높은 문명과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지 못한 콜럼버스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콜럼버스에게 자금을 대주는 것은 물론 이익의 10%를 떼어 주고 새로 발견한 땅에 대한 통치권한을 주기로 약속한 이사벨라 스페인 여왕의 뜻을 받들어 그 곳에 묻혀 있을 무궁무진한 ‘금’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눈에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다 ‘황금’으로 보였겠지요. 그들이 찬 금 귀걸이를 보고 눈이 번쩍 뜨인 콜럼버스는 원주민 몇 명을 납치하여 금이 있는 곳을 대라고 족치기도 했다지요. 그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 땅의 주인은커녕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짐승들 중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금을 캐는데 사용할 훌륭한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콜럼버스는 나중에 항해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미국 민중사, 하워드 진)

 

콜럼버스와 함께 배를 탔던 한 선교사가 발표한 글에는 당시 콜럼버스를 비롯한 백인들이 원주민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하루는 3천 명에 달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베고 여자들은 강간한 후 살해했다. 달아나는 아이는 창을 던져 죽이거나 붙잡아 사지를 잘라 죽였으며, 일부는 끓는 비누에 삶아 죽였다. 또한 개를 풀어 이들을 돼지처럼 몰아 죽였으며,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낚아채 그들이 끌고 온 개에게 먹이로 던져 주었다. 그리고 한 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거나 목 베는 내기를 했으며, 바위에 짓이겨 죽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지막한 교수대를 만들어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원주민들을 목매달고 저주받은 예수의 13번째 제자를 본 떠 13명씩 죽였다.(원주민 사회의 파괴에 대한 소고, 라스카사스, 1552년)

이렇게 시작된 아메리카의 비극은 이후 수세기에 걸쳐 침략과 약탈, 야만적인 학살로 점철됩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만행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아메리카의 비극은 영국이 식민지 건설에 착수한 17세기 이후부터 본격화됩니다. 주로 중남미 지역에 침입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금을 약탈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후 북미에 들어온 영국은 직접 땅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원주민들과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콜럼버스 이후 ‘신대륙’ 아메리카를 향한 유럽 각국의 진출은 더욱 가속화됩니다. 스페인, 포르트갈은 물론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땅 따먹기’ 경쟁에 참가한 것입니다. 이미 1602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 네덜란드는 허드슨 강 유역을 항구로 개발하고 자기 나라 도시의 이름을 따 ‘뉴 암스테르담’이라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프랑스는 이보다 오래 전인 1584년 지금의 (캐나다) 퀘벡 지역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한 후 남쪽 미시시피 강 하구의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뒤늦게 각축전에 뛰어든 영국은 1606년 제임스1세의 칙허장(영국 국왕의 허가서)에 따라 ‘런던회사’, ‘프리미어 회사’ 같은 식민지 개척회사들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으로 토지에서 내몰린 농민들이 부랑자로 전전하거나 도시 주변에 거대한 실업자, 빈민군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개척회사들은 “신대륙에는 임자가 없고 아무도 가꾸지 않는 땅이 널려 있다”는 등의 감언이설로 이들을 꼬드겨 식민지 개척 사업에 동원하게 됩니다.

 

 

■ 필그림스의 상륙

 

우리는 1620년 영국에서 박해받던 청교도들이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했고, 인디언들의 무자비한 공격과 험난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자유의 땅 아메리카를 건설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은 이미 1607년에 런던회사에 고용된 일군의 식민지 개척단을 보내 최초의 영국 식민지인 제임스타운(지금의 버지니아)을 건설하여 운영해 오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영국 정착민들이 온갖 어려움 끝에 버지니아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회사는 지속적으로 개척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이주시켰고, 1620년에 메이플라워 호에 올랐던 이들 역시 버지니아 회사(런던회사는 버지니아 식민지가 정착단계에 들어서자 이름을 ‘버지니아 회사’로 바꾼다)로부터 정착비용을 지원받고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당시 102명의 이주민 중에서 ‘박해받던’ 청교도는 35명에 불과했고, 이들 역시 다른 개척민들처럼 버지니아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은 미국의 개국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고난의 순례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영국정부의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있었는데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가 전면적으로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던 이들이 네덜란드를 떠나 다시 아메리카로 떠난 것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 헌신적인 순례자, 극적인 모험 따위와는 거리가 먼,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처절함만이 존재했을 뿐입니다.

 

 

■ 우애를 학살로 되갚은 양키들

 

1620년, 영국의 플리머스 항을 출발한 이들이 악천후로 길을 잃고 헤매다 도착한 곳은 애초 목적지였던 버지니아에서 수 백 마일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출발지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이름붙인 이곳은 지금의 매사추세츠입니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들은 하얀 피부색의 이방인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이들에게 식량과 종자를 제공하고 농사짓는 법, 물고기 잡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1621년 첫 수확을 놓고 그들에게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잔치를 벌이고 감사예배를 가진 것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디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자리를 잡고 정착하게 되자 본토(영국)에서는 더 많은 개척 노동자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보다 많은 땅을 갖기를 원했던 백인(개척회사들이 이들을 보낸 이유 중에는 이들 고용된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땅을 개척하고 사용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됩니다.

 

 

불과 수백 년 전, 문명국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유럽의 백인들이 저지른 만행은 실로 끔찍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쓴 몇 가지 역사적 기록들만 들추어 보더라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서부영화에서 보아 온 인디언들의 ‘머리가죽 벗기기’는 그들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죽 벗기기는 인디언들이 아니라 백인으로 구성된 인간 사냥꾼들의 수법이었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1775년 매사추세츠 의회의 포고령을 보면 “남자의 머리가죽을 가져오면 40파운드, 여자나 12세 이하의 머리가죽에 대해서는 20파운드”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공연하게 인디언 학살을 독려했고, 두 당 얼마씩의 포상금에 맛 들린 인간 사냥꾼들은 사냥한 인디언의 무거운 머리통을 들고 다니는 것보다 그 가죽만을 벗겨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사냥한 꿩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멋진 사냥꾼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는 일부 광폭한 사냥꾼들이나 무법자들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는 물론 종교지도자, 언론 등이 모두 나서서 전 사회적인 광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진행된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인디언들을 ‘짐승의 먹잇감’이라며 ‘박멸’할 것을 주장했고, 7대 대통령을 지낸 앤드류 잭슨은 원주민을 붙잡아 사지를 절단하고 일부는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후 전신을 말려 말안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2)

 

이것만이 아닙니다. 강경하게 맞서던 인디언들에게 거짓 협상을 제안하고 그들에게 선물이라며 ‘천연두 병원에서 가져온 담요’를 주어 아메리카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게 하여 수많은 인디언들을 몰살시키는 잔인하고도 비열한 짓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또 1863년 3월 24일자 ‘로키 마운틴 뉴스’는 “모두 죽여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인디언 학살을 선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수백 년에 걸친 백인의 야만적이고 체계적인 학살로 인해 당시 3,000만 명으로 추산되던 북미주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지금은 불과 140만 명(1980년대 기준)만 살아남았다고 하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종 청소’라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1994년 다수족인 후투족에 의해 100만 명의 투치족이 학살당한 르완다 인종 청소에 대해 미국이 ‘인권’ 운운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입니다.

 

현재 미국 땅에 남아 있는 인디언들은 미국의 지속적이고 배타적인 차별정책으로 인해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고 마약과 술에 찌들어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정부는 1860년부터 소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것을 만들어 인디언들의 생활권을 제한해 왔습니다. 말이 좋아 보호구역이지, 그 실상은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광활함과 웅장함 때문에 관광 코스로 널리 알려진 그랜드캐년이나 옐로스톤 같은 곳에 인디언들을 몰아넣고 감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랜드캐년 같은 곳은 계곡의 깊이가 최고 1,700미터에 달하며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기 힘든 척박한 황무지로 농사를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은 관광객들에게 싸구려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 백인정부의 시각에서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 신천지 아메리카를 독점하라!

 

스페인, 프랑스 등에 비해 늦게 정착한 영국 정착민들은 땅에 커다란 집착을 보이면서 정부의 지원 아래 공격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나갑니다. 1664년에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여 뉴암스테르담을 빼앗고 찰스1세의 동생인 요크공의 이름을 따 뉴욕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1756년에는 프랑스와 ‘7년 전쟁’을 벌여 캐나다로부터 플로리다에 이르는 미시시피 강 동쪽의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전쟁광들은 다시 캐나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합니다. 1812년에는 12,000여명의 육군병력을 투입, 캐나다 토론토를 점령하여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합니다. 영국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려나고 말았지만, 어쩌면 백악관의 지배자들은 지금도 캐나다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칠 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욕심이 이제는 남미로 눈을 돌립니다. 독립영웅 미구엘 이달고의 지휘 아래 전개한 혁명전쟁을 통해 1821년 독립한 멕시코는 미국의 침략을 받습니다. 이미 1836년 텍사스인들을 선동하여 멕시코로부터 분리 독립시킨 미국은 1846년 군대를 멕시코 영토인 리오그란데 강으로 이동시켜 멕시코를 자극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명백한 군사도발을 통해 전쟁을 만들어낸 미국은 2년여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등 광대한 땅을 손에 넣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845년부터 미국은 이미 그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워싱턴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유니언’지는 “서부를 향해 쇄도할 급류를 어느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캘리포니아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서부 사람들의 행진을 누가 멈추게 할 것인가?”라면서 멕시코에 대한 도발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 정부의 뜻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미국은 필그림스들이 발을 들인 1620년 이후 수차례의 전쟁과 학살을 통해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고 아메리카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미국인들의 대표적인 국민성 중 하나라는 ‘프론티어(frontier) 정신’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과 개인의 탐욕이 맞물린 산물에 불과합니다. 흔히 ‘개척자 정신’으로 불리는 프론티어 정신은 용기, 진취성, 개인주의, 합리주의를 상징합니다.

 

프론티어(frontier)는 ‘변경’이라는 뜻인데 미국정부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접경지대라는 뜻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국정부의 공식 정의에 따르면 ‘1평방 마일당 인구 2인 이상의 지역과 그 이하의 지역과의 경계를 잇는 선이라 규정되어 있으며, 아직 충분히 문명화되어 있지 않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두산백과사전)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에 당시의 상황을 접목시켜 본다면 그 본질은 아주 간단히 드러납니다. 사람(미국인)이 살지 않는, ‘문명화되지 않는 빈 땅’, 즉 인디언의 땅을 빼앗아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이를 권장하기 위해 1910년에 ‘홈스테드 법(변경에 일정기간 거주하면 거주자에게 그 땅의 권리를 인정하는 제도)’이라는 것을 제정합니다. 한 마디로 누구든지 말을 달려 드넓은 영토에 말뚝을 박고 인디언의 공격이나 자연재해, 그 외에도 그 땅을 탐내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쳐 살아남는다면 주인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자신의 땅을 갖고자 하는 강한 욕망(진취성)과 인디언들의 영토를 향해 총을 들고 진격하는 용기가 요구되겠지요. 그 결실이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은 자의 몫(개인주의)이 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갖추는 것(합리주의)도 잊지 않습니다. 물론 그 법과 제도는 분쟁 당사자 간의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승자의 권한만을 보장하는 ‘정글의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두기위해 수많은 침략전쟁을 서슴지 않는 미국의 태도 역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프론티어 정신의 발로일 뿐입니다. 가장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느 때보다 프론티어 정신이 강조되는 것 역시 신자유주의의 기원이 미국인 사실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 영국 물러가라!

 

한편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점차 넓혀가던 영국 정부는 이주민들에 대한 통치 질서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또한 유럽 나라들과의 잦은 충돌로 인한 막대한 전쟁비용을 감당해야 했고, 점차 영국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영국 정부의 태도는 식민지 정착민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1651년 항해조례를 통해 영국정부에서 지정한 품목들은 영국이나 영국식민지에서만 판매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식민지 경제에 대한 간섭과 개입이 강화되자 영국본토와 식민지 간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버지니아에서 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이 수도인 제임스타운을 초토화시키는 ‘베이컨의 반란’이 일어나고,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는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베이컨의 반란을 진압한 영국정부는 식민지의회를 해산하고 회사 식민지에서 왕령 식민지로 바꾸는가 하면 식민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점차 늘려갑니다. 1764년에 제정한 ‘설탕법3)’이나 그 이듬해 제정된 ‘인지세법’ 등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특히 서적은 물론 모든 서류에 영국 정부가 발행한 인지를 붙이게 한 인지세법은 식민지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식민지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메리카 전역으로 폭동이 확대되어 각지에서 ‘자유의 아들들’과 같은 저항단체들이 조직되고 급기야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확산되자 놀란 영국 정부가 인지세법을 폐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국 정부를 향한 불만은 수그러들지 않고 13개 주 중에서 9개 주의 대표들이 모여 ‘대표없이 과세없다’는 원칙을 결정하는 등 영국정부에 대항한 자치 움직임이 갈수록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 독립선언서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보스턴 학살사건’ ‘보스턴 차 파티’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고 영국정부의 강경한 대응이 이어지자 급기야 영국의 조치에 대항하는 ‘1차 대륙회의’가 소집되기에 이릅니다.

 

1774년 조지아 주를 제외한 12개 주의 대표 55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식민지 의회가 모든 입법의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전쟁을 준비할 것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하게 됩니다. 곳곳에서 영국 군대의 무기고가 습격당하고 관공서가 불타는 등 식민지는 이제 본격적인 반영 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페트릭 헨리의 연설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영국군이 콩고드의 식민지 민병대를 공격하고 다시 민병대가 돌아가는 영국군을 습격하여 적잖은 사상자를 내는 등 양측의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소집된 2차 대륙회의는 대륙군의 창설을 결의하고 대농장주였던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2차 대륙회의에서는 독립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었고,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마침내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의 독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영국 정부는 하우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3만여 병력을 파병하였고 1783년 파리조약까지 7년여에 걸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1776년은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해이기도 합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을 잡은 경전이라면, 독립선언서는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국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449599  (<==위 글에 이어지는 다음 호 주소)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449449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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